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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의선 광인 Oct 07. 2024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한강<소년이 온다>를 읽고

만약 사랑하는 이가 잔혹한 죽음을 당했는데 당신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때

그 비통함에 대해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이 소설 속 살아남은 이들도 처절하게 그 원통함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루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 은숙이 동호를 기리며, <3장 일곱 개의 뺨>에서


때는 광주 민주화 항쟁이 일어난 1980년 5월,

포화 속에서 실종된 친구 정대를 찾기 위해 고등학생 동호는 시민군을 돕는다.

그들을 도와 시민들의 시체를 수습하다 보면, 그중에서 정대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계엄군이 쳐들어오기로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고,

시민군 중 여자와 학생들은 후퇴하고 젊은 남자들만 남는다.

동호는 모두의 만류를 뒤로 하고 정대를 찾기 위해 끝까지 남는다.


계엄군은 항복 의사를 밝힌 동호를 포함한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죽인다.

그러곤 끝까지 투항한 남성들을 비인륜적으로 고문하고 감금한다.

노조 시위에 참여한 여공들도 빨갱이라며 성고문한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고통스럽고 암울한 고문과 죽음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산 자에 대한 고문과 죽은 자의 몸이 썩어 문드러지는 과정에 대한 표현이 워낙 역겹고 끔찍한 나머지,

‘내 주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지'란 생각에 두려웠다.

이 책을 읽는 한동안 삶에 대한 회의감이 들어서 인생의 어떤 것도 제대로 즐기지 못할 정도였다.

작가 또한 이 책을 쓰는 동안 그가 느낀 압도적인 고통에 거의 매일을 울었다고 한다.


예식장의 샹들리에는 화려했다. 사람들은 화사하고 태연하고 낯설어 보였다.
믿을 수 없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
예식이 끝나고 점심을 먹으러 가자는 사람들에게 변변히 변명하지 못한 채 나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 <에필로그>, 집필 중 작가가 느꼈던 감정에 대해


한강 작가는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끝까지 이 작품을 출간하였는가?

이 작품의 시초는 작가의 유년 시절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돌아간다.

작가가 살던 집에서 살았던 실제 5.18 희생자 강동호 씨,

그리고 5.18 회고 사진집에서 본 두개골이 함몰된 이름 모를 소녀.

어릴 적 듣고 보았던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와 이미지가 작가에겐 큰 충격이었다.


그렇게 성인이 되고 작가가 된 그는 사료 조사를 위해 사건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수집한다.

사건의 흔적들, 역사 기록관, 동호 형님과의 인터뷰, 동호의 무덤.

그 모든 것들에서 작가는 안타깝게 역사의 희생양이 되었던 어리고 순수한 영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작가는 억압적인 현실 속에서 친구를, 시민들을, 신념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처절하게 저항한 소년들에 대한 찬가를 그려냈다.

소년들 중 누군가는 핍박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고,

누군가는 고문과 주변인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진 채 생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 경험은 방사능 피폭과 비슷해요,라고 고문 생존자가 말하는 인터뷰를 읽었다.
뼈와 근육에 침착된 방사성 물질이
수십 년간 몸속에 머무르며 염색체를 변형시킨다.
세포를 암으로 만들어 생명을 공격한다.
피폭된 자가 죽는다 해도, 몸을 태워 뼈만 남긴다 해도
그 물질이 사라지지 않는다.
- <에필로그> 중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5.18 피해자의 10%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주변 이들이 총알 1발에 맥없이 죽어나가고 끔찍한 고문에 인간성을 상실하는 걸 맨눈으로 본 사람들에겐

이 책을 읽느라 몇 주간 느꼈던 나의 고통과 같은 것이 평생 동안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남은 생존자들에게 생을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한다.

이 책의 등장인물인 성희의 말마따나, 그대들은 모두 고귀하니까. 모든 생명은 똑같이 고귀하니까.


언니를 만나할 말은 하나뿐이야.
허락된다면. 부디 허락된다면.
죽지 마. 죽지 말아요.
- 임 선생이 유년시절 노조 운동을 이끈 성희를 기억하며, <5장 밤의 눈동자> 중


나는 1980년 당시의 집권세력과 그에 대한 정치적 반발 중 어떤 게 옳고 그른지 감히 판단하지 못하겠다.

다만 어떠한 세력이든 간에 다시는, 다시는 이 땅에서 같은 민족을 비인간적으로 탄압하여서는 안된다.

일단 나부터가 그런 일을 당하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이 땅의 고귀한 생명들을 한 명이라도 희생하는 멍청한 짓을 하여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인적 자원이 극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이를 아무리 강조하여도 모자라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상과 이념적 갈등을 어떻게 현명하게 타협할 수 있는지,

어떠한 희생도 없이 윈-윈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나뿐만이 아니라 당신이 진심으로 이 나라를 아낀다면 진심을 담아 숙고해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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