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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의선 광인 Oct 06. 2024

조커라는 전염병에 감염되지 않으려면

영화 <조커 : 폴리 아 되>를 감상하고

정신병에 전염성이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내 주변인들이 1호선 빌런들의 그것에 감염되어 그들처럼 행동한다면 너무나도 끔찍할 것 같다.

놀랍게도 이 끔찍한 현상은 실존한다.

‘폴리 아 되(공유정신병)’은 한 사람의 정신질환에 감응한 다른 이가 같은 질환을 앓게 되는 현상이라고 한다.


이 작품의 주제는 ‘아서 플랙은 조커인가? 또는 둘은 분리된 자아인가?’라는 질문에서 비롯된다.

어쩌면, 조커라는 건 아서뿐만이 아니라 고담 시민 전부를, 인류 모두를 감염시킬

일종의 전염병이 아닐까?



전작에서 그를 무시했던 여섯 명의 사람을 죽인 아서는 정신병동에 수감된다.

그 안에서 억압과 폭력에 시달린 탓에 광기를 잃은 그는 무기력하게 다가오는 재판을 준비한다.

아서의 변호사는 아서와 조커는 별개의 자아이고, 아서가 다중인격장애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아서를 부추긴다.

아서는 그녀의 주장에 대해 긴가민가하지만 역시나 무력하게 그녀의 지시를 따른다.


그러던 중 그는 정신병동 합창모임에서 조커에 대해 호감을 표현하는 를 만나게 된다.

리는 아서의 변호사와 달리 아서와 조커는 같은 인물임을 주장하며,

아서가 조커로서의 자아를 되찾아 자유를 누리기를 바란다.

아서가 리와 함께할 때마다 둘의 장밋빛 노래를 약속하는 황홀한 노래가 극장을 울려 퍼진다.


리로 인해 자신감을 얻은 아서는 그의 변호사를 해임하고 재판에서 자기 자신을 변호하게 된다.

조커 의상을 입고, 조커 분장을 하고 법정이 토크쇼인 것처럼 거드럭대며

자신이 곧 조커고, 조커가 곧 본인임을 공연시하였다.


하지만 증인으로 나온, 자신에게 호의적일 것이라 여겼던 전 직장동료 개리가 아서를 두려워하는 걸 보며

회의감을 느낀다.

법정에서 헐뜯었던 정신병동 교도관들에게 린치를 당한 이후에 그의 무력감은 더욱 커진다.


결국 아서는 너무나 지쳐버린 나머지 법정에서 ‘조커는 죽었어요’라며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토로한다.

여지껏 아서의 행위를 적극 지지했던 리는 실망하여 아서에게 이별을 고한다.

그녀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조커임을 아서가 포기해 버렸기 때문에, 아서는 더 이상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모든 걸 잃은 아서는 정신병동으로 돌아간다. 다른 수감자에 의해 칼에 찔려 쓰러진다.

그를 찌른 수감자는 마치 아서가 그랬던 것처럼 웃음을 참지 못하며 자기 입을 칼로 찢는다.

새로운 조커가 탄생한 것이다.



아서는 조커의 죽음을 선언했지만, 그 주장은 새로운 조커의 등장으로 거짓이 되어버렸다.

조커라는 자아는 죽지 않고 전염되는 정신병(폴리 아 되)으로서 그 명맥을 계속 이어갈 것이다.

과연 아서를 찌른 새로운 조커가 유일하게 전염된 조커일까?

아니. 이미 작품 곳곳에 등장하였던 조커 추종자들도, 리의 반사회적 행동도 조커와 너무나도 닮아있다.


아서의 조커를 보고 열광하여 그와 닮아가는 이들은 언제든 새로운 조커로서 사회를 망가뜨릴 시한폭탄이다.

언제 자신을 무시한 사람에게 총구를 들이밀고,

언제 다른 이를 칼로 찌르고는 웃음을 참지 못해 어쩔 줄 모를 것이다.

이 조커라는 질병은 만연해져 점점 사회를 파괴할 것이다. 공포스럽지 아니한가?


다행히도 감독은 이미 전작에서 이에 대한 예방책을 제시했었다.

전작을 통해 감독은 ‘평범한 개인도 불행한 상황을 한꺼번에 겪는다면 미쳐버릴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며,

‘주변에 조금만 눈길을 주고 배려한다면 다른 이의 파멸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는 공동체의식을 강조한다.

이번 작품에서는 이 광기가 다른 이들에게 전파될 수 있음을 알리며,

주변인들을 신경 쓰지 않고 무시하였을 때 우리 사회의 결말을 경고하는 듯하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누군가의 심리 기전이 과거의 경험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과거의 트라우마를 스스로 극복해 내는 밝고 긍정적인 초인들이 일부 존재하긴 하나,

우리 주변의 갑남을녀들은 이전에 겪었던 일들에 의한 심리장애들을 한두 개쯤 가슴에 품고 산다.


늘 태평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을 두드려 보면
어디에선가 슬픈 소리가 난다.

-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소로이다>에서


우리 모두는 오늘도 각자의 트라우마와 문제점을 안고 각자의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그 힘겨운 싸움의 내막을 100% 이해할 순 없지만, 오늘도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두에게 친절하자.

과거의 경험에서 발버둥 치는 나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만큼 다른 이들에게 연민의 감정을 가져보자.


어쩌면 조커라는 건 타인에 대한 친절과 관심으로 종식할 수 있는 질병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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