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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의선 광인 Sep 22. 2024

헤르만 헤세와 싯다르타의 닮은 꼴 찾기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를 이해하고자 발버둥 친 흔적

솔직히 이 책의 주인공을 이해하는 일은 꽤나 고역이었다. 이 정신 나간 수행자는 어째서 수행을 업으로 삼다가 갑자기 속세로 관심을 돌려 쾌락에 찌들어 살고, 그러다가 자기 자신을 역겨워하며 강으로 뛰쳐나가는 것인가? 미모의 애인과 거액의 재산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나에겐 정말 공감할 수 없는 행보다.  질투 난다 너


소설은 작가의 인생을 투영하는 매개체이다. 분명 헤르만 헤세의 인생을 반추하다 보면 이 싯다르타의 인생은 닮은 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

선교사의 아들. 목가적인 집안환경과 신학교의 부적응자. 하지만 뛰어난 필력을 젊은 시절부터 일찍이 빛낸 유능한 작가. 조국의 전쟁에 대한 회의감과 고뇌. 불교와 도교 등 동양 철학에 대한 관심으로 승화.


아하, 점점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싯다르타는 헤세의 인생을 조금 더 예쁘고 유려하게 다듬은 모습인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싯다르타의 1부 내용은 헤세가 생각한 자기 유년시절의 이상적인 버전이라고 한다. 철저한 기독교 집안의 문제아였던 저자와는 달리 싯다르타는 성실하게 아버지 밑에서 제사와 수행에 대해 공부한다. 젊고 빛나는 그의 모습은 동네 처녀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선교사를 꿈꿨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던 헤세는 사실은 싯다르타처럼 부모의 기대에 성실하게 보답하는 인기 있는 모범생이 되고 싶었으리라.


2부에서 아름다운 매춘부 카말라와 거상 카마스마비를 만나 속세에서의 일상을 꾸려나가는 싯다르타의 모습은 남편으로서, 작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한 헤세를 반영하였을 것이다. 카말라가 싯다르타에게 ‘당신은 사랑을 할 수 없어요’라고 체념하듯 얘기했듯이, 헤세의 무려 3번의 결혼 생활은 그다지 해피 엔딩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본인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는 영 젬병이라고 자각하면서, 이 책에 사랑의 불구였던 자신에 대한 반영을 드러내며 반성을 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헤세가 독일의 전쟁에 반대하고 1차 세계대전에서도 억지로 입대하게 된 것은 마치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카마스마비의 권유에도 반응하지 않는 싯다르타와 닮아있다. ‘전쟁과 침략(공격적인 사업)을 통해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인가?’라는 조국(카마스마비)의 질문에도 불구하고, 강경하게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면이 말이다.


2부의 끝자락에서 노인이 된 싯다르타가 강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고 해탈한 모습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조국에서 벗어나 불교와 도가 사상을 체험하며 깨달음을 얻은 헤세를 비유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기독교 신학의 틀을 깨고 아시아의 이도교를 공부하게 된 건 어쩌면 당시 세계가 마주하고 있던 전쟁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정신줄을 단단히 잡고 인류에 대한 사랑을 깨우치기 위한 이국적인 방법을 찾고자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이도교에 대한 탐구로 얻게 된 결론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강으로 모여 ‘옴’이라는 태초의 소리로 합쳐진다는 것,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이 똑같이 사랑스럽다는 것. 모든 것들을 애정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 헤세가 인생에 걸쳐 깨달은,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진리일 것이다.


사물들이 나에게 그토록 사랑스럽고 숭배할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일세. 그 사물들은 나와 동류라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지. 그리고 그것은 이제 가르침이네.

세상을 들여다보고 설명하고 경멸하는 일은 위대한 사상가가 할 일인 것이네.
하지만 이 세상을 사랑하고 경멸하지 않고 이 세상과 나를 사랑과 경탄 그리고 외경심을 가지고 관찰할 수 있는 것만이
나에게는 비할 나위 없이 중요한 일이네.

- 싯다르타, 그의 수행법을 궁금해하는 친구 고빈다에게


나는 헤세에 대해 알아보면서 그의 불행했던 결혼생활과, 아내들에 대한 그의 갑질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데미안을 쓴 희대의 위인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그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책 싯다르타가 말하듯, ’이 모든 것들은 합쳐져 태초의 옴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모든 것은 나이고 나는 모든 것들과 동류‘이다. 그도 마찬가지이고 나조차도 내가 혐오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분명 있다. 내가 헤르만 헤세를 그의 단점까지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봄으로써, 나 자신의 미운 면조차도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이들을 사랑하도록 노력해 보자. 모든 이들이 나이고 내가 모든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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