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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의선 광인 Sep 18. 2024

깨닫기 위해 진짜로 필요한 것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서 찾는 진리의 학습법

여기 자격증 취득을 위해 공부 중인 두 명의 사람이 있다. 전자는 명문 대학에서 4.5 만점의 성적으로 졸업 직전인 학부생 A, 후자는 대학 문지방 앞에 들어가 보지도 못한, 실무 경력 10년 차 직장인 B. 이 둘 중 누가 자격증을 딸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는가? 나는 A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망설임 없이 B를 선택할 것이다.


나를 너무 나무라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나도 몇 년 전까진 B보다는 A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된 결과 뼈저리게 느낀 것은, 직접 겪어보는 것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학습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것이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책 <싯다르타>의 주인공 싯다르타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수행자이다.


이 책이 불교의 창시자이자 4대 성인 중 한 명인 고다마 싯다르타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주인공 싯다르타는 부처와는 다른 길을 걸어온,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결국 열반에 들며 끝나는 것은 동일하지만 말이다


부처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는 것을 거절하다니 그는 떡잎부터가 남다른 수행자이다. 싯다르타, 그는 정말 웃기는 인간이다. 열반에 들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난 위대한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싫다고 하면서, 매춘부와 상인, 뱃사공의 제자가 되기를 자청한다. 아주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그의 변을 들어보면 납득이 안 되는 논리는 또 아니다. 그는 부처의 말씀이 틀렸다고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가르침은 직접 겪어보지 못하면 그 진리를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세존께서는 세존의 독자적인 길에서, 사고를 통해서, 몰입 수행을 통해서,
인식을 통해서, 깨달음을 통해서 해탈을 얻으셨습니다.
그것은 가르침을 통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오, 세존이시여!
저는 어느 누구도 가르침을 통해서 해탈에 이르지는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 싯다르타, 부처의 제자가 되기를 거절하며


반대로 그가 스승으로 모셨던 속세의 인간들은 다르다. 매춘부이자 연인이었던 카말라는 싯다르타에게 사랑의 기술을 끈적한(!) 몸의 대화를 통해 가르쳤다. 거상 카마스바미는 싯다르타에게 직접 사업을 운영하게 하여 속세와 타락의 맛을 가르쳤다. 뱃사공 바수데바는 강에게서부터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합쳐져 옴(완성)이 된다’라는 진리를 얻을 수 있도록 지도했다.

다시 말해 싯다르타가 직접 체득할 수 있게끔 유도한 것이다.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을.’ 그는 스스로 생각했다.
‘모두 스스로 맛보는 것은 좋은 일이다. 속세의 쾌락과 부가 좋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이미 어렸을 적에 배웠다. 오래전에 알았지만 지금에야 비로소 그것을 제대로 체험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을 단지 기억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마음으로, 위로 알고 있다. 내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참 다행이다!’
- 싯다르타, 속세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강으로 돌아가며


그는 부처의 가르침과 속세 사람들로부터 배운 것의 차이를 언어의 한계로 설명한다. 언어를 통한 가르침은 사물의 연속성과 완전성을 완전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 된다고? 이 책의 주인공 싯다르타를 예로 들어보자.


책 초반에서 그가 젊고 잘생긴 브라만 수행자일지라도, 어느 순간엔 속세에 찌든 부자 장사꾼이 될 수도 있고, 언젠가는 늙고 바보같이 웃는 뱃사공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들 중 누구를 싯다르타라고 부를 것이고 어느 누구를 싯다르타가 아니라고 할 것인가? 시간으로 인해 사람이 바뀌었어도 위 셋은 여전히 싯다르타이다. 


하지만 언어로 된 가르침은 어떻게든 쉽게 설명하기 위해 이 연속적인 존재를 이분법적으로 가른다. 아래 주인공의 대사를 통해 조금 더 쉽게 이해해 보자.


“사상을 가지고 생각할 수 있고,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일면적인 것이네. 모두 다 반쪽일 뿐이며, 모두 다 전체성, 원, 단일성이 결여되어 있네. 그래서 세존 고타마께서 세상에 대해 말씀하실 때, 세상을 윤회와 열반, 미혹과 진리, 번뇌와 해탈로 나눌 수밖에 없었다네.”
“하지만 우리를 에워싸고 있고, 우리 마음에 내재하고 있는 존재는 결코 일면적이지 않다네. 한 인간이나 한 행위가 완전한 윤회이거나 완전한 열반이 아니며, 한 인간이 완전히 신성하거나 완전히 죄를 짓고 있는 것도 아니네.”


이해가 조금이라도 될는지 모르겠다. 나도 책을 읽고 이 감상문을 쓰기 직전까지도 '사물의 연속성(완전성)'과 '학습법'에 대해 어떻게 엮어야 할지 정말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이걸 우리가 새 언어를 공부할 때로 치환하여 얘기해 보면 이해가 쉬워질 것이다. 문법을 배울 때면 강사들은 이럴 땐 이 단어를, 저럴 땐 이 단어를 쓰라며 달달 암기를 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실전문제를 풀어보면 우리가 배운 내용에 예외사항이 있었다면서 당신이 틀렸다고 비웃는다. 대체 어쩌라는 말이냐.


이건 언어의 연속성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그 언어는 분명 원래부터 이중적으로 존재했을 뿐이다. 다만 사람들이 누군가를 쉽게 가르치기 위해 '문법'이라는 틀을 개발하다 보니 언어의 연속성을 깨트릴 수밖에 없게 되어 수많은 예외를 낳게 된 것이다.


때문에 문법 공부를 코피 흘려가며 한다고 해서 당신은 그 언어를 통달할 수 없다. 연속성이 낳은 수많은 예외에 깔려 죽고 말 것이다. 대신 직접 그 언어를 꾸준히 사용해 버릇하면서 오류를 수정해 나가야 어느 순간 원어민만치 그 언어에 능통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 언어가 때로는 이렇게, 때로는 저렇게 쓰인다는 양면성과 완전성을 깨달았기 때문에. 


'완전성과 연속성'이라는 단어는 학습에 대한 저자의 태도뿐만이 아니라, 이 책의 주제의식과도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다. 세상의 모든 좋은 것, 나쁜 것,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모든 것은 결국엔 하나로 이어진다. 한 순간 어떤 것은 위대하고 성스러울 수도, 때로는 저급하다고 비열할 수도 있다. 이렇게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게서 배울 점이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건 사랑스럽고 신성하여 숭배할 가치가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면 되는 것이다.


갑자기 이 세상을 사랑하라니 이게 갑자기 무슨 논리 없는 결론이냐고? 나도 이 논리적 비약을 이해하는 게 정말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저자 헤르만 헤세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였다. 다음 편에 계속...!


'헤르만 헤세와 싯다르타의 닮은 꼴 찾기'와 이어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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