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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시딘 Feb 03. 2020

말보로, 레드

기억하는 그 느낌이 맞았다. 담배잎을 태운 연기가 필터와 입, 폐를 거쳐 뇌와 온 몸으로 퍼지는 나른함. 부스 안에 나란히 선 남자가 담배를 피우며 스마트폰에 집중하고 있었다. 영선은 흡연부스에서 담배를 피우면 몸에 냄새가 그대로 베어드는 게 너무나 싫었다. 공항 게이트 안엔 야외에 흡연 장소가 없었다. 담배를 피우는 동안 몸에 스미는 것과 밖을 떠도는 연기는 그녀에게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폐 속으로 스미는 것들은 더욱 치명적으로 몸과 정신을 흩뜨려 놓는다. 이것을 중독이라고 한다면, 그에게 중독된 것인가. 영선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간지러운 말, 거창한 단어를 그에게 붙이고 싶지도 않았다.


담배를 완전히 끊고 싶게 만든 것도 그였고, 힘들게 끊은 담배를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것도 그였다. 오년간을 끌어온 이 지리멸멸한 애정 행각을 끝내고 싶었다. 그에게 투사된 애정을 버리고 바꾸는 일은 결국 나를 바꾸는 일이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필터에 입을 가져갔다. 깊이 스며든 연기를 내뱉으며 어쩔 수 없는 악마같은 영혼, 그녀에게 습관처럼 스며든 그를 지우려 한숨을 쉬었다.


유리창 멀리 붉은 아침해가 뜨고 있었다. 그녀는 필터 끝에 빨간불이 바짝 붙은 담배를 끄고 잠시 붉은 담배갑을 바라보았다. 하얗고 긴, 아직 아무의 발도 닿지 않은 눈길 같은 새 담배를 한 대 꺼내 손에 쥐었다. 옷에 베어들기 시작한 담배냄새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하지 않아도, 아니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할수록 성가신 일들을 하게 만드는 너, 담배같은 새끼. 그녀는 더욱 깊은 한숨을 쉬도록 할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


재식이 그녀에게 다가온 날은 회사 전체 야유회 행사가 있었다. IT회사 특유의 개인적인 분위기가 있었지만 그래도 ‘조직’으로서 1년에 한번 전사 차원의 야유회는 반드시 참여해야 했다.

캐릭터 디자이너인 재식과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영선도 회의 이외에 사적인 자리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적어도 영선에겐 그랬다. 여직원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재식에게 영선은 별 관심이 없었는데, 사실 평범한 자신에게 그처럼 화려한 남자가 관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타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강릉, 바다가 멀리보이는 칠성산자락에서 회사의 로고 컬러인 오렌지색 바람막이를 입은 직원들은 상품이 숨겨진 곳을 표시한 지도를 들고 산을 헤메다녔다. 보물찾기 행사는 회사의 대표 게임 ‘왕조의 손톱’을 패러디 한 것이었다. 칠성산은 등산로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야생과 같은 느낌을 풍겼다. 지도를 보며 능선을 오른 영선은 괴이하고 커다란 서낭당을 지나 낡은 오두막에 도착했다. 주변을 보니 직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길도 없고 인적도 없는 이런곳에 총무팀이 다녀갔을리 없다고 생각한 영선은 길을 잃었다는 생각에 약간은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초여름의 숲은 이미 검푸르게 울창해져 있었다. 간간히 들리는 매미소리를 뒤로하고 발걸음을 돌리던 순간이었다.


“누구야? 서낭신 앞을 그냥 지나면 안돼지.”

어디서 나타났는지 허리굽은 노파 한명이 나무 밑에 앉아 있었다. 백발의 머리와 비슷한 색으로 설태가 낀 듯 눈동자가 뿌옇게 보였다. 미세한 누에고치에 싸인 듯한 눈에선 괴괴한 빛이 흘러나왔다.

“길을 잃은 것 같아요. 이쪽으로 나가면 되는 거죠?”

“그려. 가면 되는데, 담배나 하나 줘봐.”

영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낭당 아래 앉은 노파에게 담배를 건냈다. 노파가 자신의 옆에 앉으라는 듯 나무를 괴어둔 돌을 손으로 두드렸다. 그녀는 이끌리듯 그 자리에 앉아 담배를 꺼내 피웠다. 두 개의 가느다란 연기가 천조각이 어지러이 달린 서낭당의 나무의 꼭데기까지 홀연히 올라갔다. 담배를 맛있게 피우던 노파는 그녀의 눈을 날카롭게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처자는 담배를 끊어야 할거야.”

영선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거에요. 이제 저도 서른인데요.”


“그래, 바로 끊게 되겠지만 계속 끊어야 할거야. 끊어야 운명이 바뀐다고. 지금 보시해서 향불을 잘 살라주었으니 아마 나무가 처자를 돌보겠네. 그래도 의지로 끊어야 해. 뒤는 절대 돌아보지 말고. 그래야 맘고생 안하고 잘 살아.”

“네, 네! 명심할게요. 감사합니다.”

영선은 생각난 듯 거의 새것인 담배갑을 노인에게 건넸다. 담배를 받아쥔 노인은 누런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물건너 온 빨간 거네? 좋아. 보시를 이리 확실히 했으니 단단히 말해줄게.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절대! 그냥 가.”

“지금요?”

영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때가 되면 알아. 아, 내가 기냥 가야 하는 거구나, 이러고. 그때 맘 바꾸지 말아. 그래야 산다.”


돌아선 영선은 왔던 길을 향해 걸었다. 지도를 보며 한참을 걸었을 때였다. 지도상에 보물상자가 보여 그쪽으로 막 이동하려 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 재식이었다.

“영선씨 찾았다! 내가 얼마나 찾았는 줄 알아요? 따라오다 놓쳤어요.”

그녀는 그가 왜 자신을 찾았는지 알 수 없었다. 맑은 얼굴의 그는 입을 크게 벌려 해맑게 웃으며 영선을 바라보았다.

“기다렸어요. 이렇게 멋진 곳에서 둘이 있게 되는 순간을. 내가 지켜본 거 알고 있었죠? 회사에서 여러번 보았거든요. 두부 반찬이랑 카레가 나올 때 나보다 더 여러번 먹는 사람은 처음이라서 신기해서 지켜봤어요. 이런 얘기를 소소하게 나누고 싶었어요.”

아....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흡연실에서 가끔 담배 피는 것도 봤어요. 우리 회사야 그런 것 신경 안쓰지만 난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우아한 영선씨에겐 담배가 어울리지 않는데, 그만 피웠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 했어요.”


이 남자는 뭘까. 영선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는 눈을 빛내며 영선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산새가 길게 소리를 끌며 울었다. 그는 그녀 옆으로 한발짝 다가서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선씨를 더 알고 싶습니다. 처음 본 순간부터 계속 그랬는데.”


그는 그녀 앞으로 한 발짝 더 다가섰다. 영선은 빨려들 듯 그의 눈을 쳐다보다 축축하고 감미로운 느낌에 눈을 감았다. 그의 긴 팔이 몸에 감겨오는 것을 느꼈다. 힘이 빠지며 그대로 기대고 싶은 이런 느낌은.... 오랜만에 담배를 피웠을 때, 아주 진한 커피를 마셨을 때처럼 가슴이 뛰었다. 그러고 보니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한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그래, 이런 느낌이었지. 영선은 서낭당 할머니의 금연에 대한 암시가 한치 앞을 바라본 예언인것만 같아 신기했다. 그대로, 뒤는 돌아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재식과 영선은 비밀리에 사내 연애를 시작했다. 미술을 전공한 그는 게임 캐릭터를 만들고 그리는 일을 했다. 작년 초, 오픈하여 중국과 미국쪽을 뜨겁게 달군 게임 ‘왕조의 손톱’에서 유저들의 극찬을 받은 손톱 캐릭터를 만든 아트디렉터가 바로 재식이었다. 능력과 잘 생긴 외모, 서른 둘의 나이에 맞지 않는 사차원같은 그의 캐릭터와 센스있는 옷차림으로 여직원들의 화제에 끊임없이 올랐다. 영선도 그의 모습을 보긴 했지만 그저 지켜보았을 뿐, 자신과 엮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인연이란 어느 곳에서 운명의 거미줄을 드리울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영선은 생각했다. 그의 질긴 거미줄에 걸리고 운명처럼 그 긴 팔에 안겼다. 꽤나 달콤하고 로멘틱하다고 영선은 자꾸만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둘은 회사에선 절대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전화와 톡의 이름도 다르게 저장했다. 비상계단이나 빈 회의실에서 만나는 어린 커플같은 유치한 짓도 하지 않았다. 회사 안에선 철저히 업무관계를 유지했고 퇴근 후 멀리 떨어진 번화가나 주말에 교외로 나가 함께 시간을 보앴다. 둘 다 독립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서로의 집엔 가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관계가 루즈해진다는 재식의 규칙이었다. 주말엔 이틀 중 하루만 만나기로 룰을 정했다. 서로 혼자 충분히 쉴 시간은 있어야 했다.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고 둘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 같아 영선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담배를 끊었다. 하루에 한 두대씩 소소하게 즐기던 담배였지만 그가 싫어하는 건 하기 싫었다. 오랜만의 연애로 일상엔 윤기가 돌았다. 그러나 그 달콤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거 들었어? 재식씨 사내 커플이라며?”

구내식당에서 식판을 떨어뜨릴 뻔한 영선은 대화의 근원지를 찾아냈다. 막 식당에 들어선 소프트웨어 2팀 이었다. 드디어 들켰구나. 전모가 궁금해진 영선은 그들의 근처 테이블에 앉아 귀를 세웠다.

“나도 들었어. 정말이야? CG팀 주이영?”

순간, 옆의 여직원이 고개를 가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난 비서실 이라고 들었는데.”

“아, 비서실은 그 전에 만났다는 이야기가 있고. 아닌가? 양다리인가? 주이영이 인스타에 올렸다던데?”

수저를 놓은 그녀들은 스마트폰을 꺼내들고 집중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영선은 스마트폰을 든 직원의 전화기를 같이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아, 영선씨는 재식씨 잘 모르죠? 이직한지 얼마 안됐으니.”

그녀의 손안에선 재식과 긴 머리의 한 여자가 웃으며 키스 하는 사진이 제멋대로 떠 있었다.. 여자 쪽에서 몰래 사진을 찍었거나 찍은 후 지우지 않은 모양이라고 직원들은 킥킥거렸다. 맞다, 그는 이런 사진을 절대 찍을 사람이 아니었다. 영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냥 만났어. 장난인거야. 알면서 그런다.”

재식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영선의 볼을 쓰다듬었다. 아,,, 영선은 눈을 감았다 뜨고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등을 만지는 손가락의 그 감촉.. 그 소소한 느낌까지 미쳐버릴 것 같은 이 남자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의 입술이 얼굴에 닿았다. 어딘지 모를 은밀한 세포가 서는 느낌. 무척이나 익숙한 느낌이었다. 영선은 그의 입술을 손으로 만지며 울 듯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제발, 나에게 신뢰를, 믿음을 줘.”

그는 그녀의 볼을 쓰다듬으며 입술을 귀에 가져갔다. 간지러운 봄바람 같은 입김을 불어넣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믿음은 내가 주는게 아니야. 네가 갖는 거지.”


담배같은 새끼.

오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를 믿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며 담배를 피웠다 끊고, 또 담배를 다시 피운 자신에게 다시 죄책감을 느끼고..... 그에 대한 약속을 저버린 것을 탓하며 그렇게 살았다. 그가 다른 사람을 보는 것도 자신 때문이고, 회사에서 다른 여자 문제에 오르내리는 것도 페이크라는, 영선이 너를 위한 것이라는 그 말을 믿었다. 믿음과 신뢰는 전적으로 영선의 몫이었다.


그와 관계를 정리하기로 마음먹고, 정리할 수 없고 또 정리되지 않아 견딜 수 없이 힘든 때였다. 거래처 였던 회사의 미국 본사에서 스카웃 제안을 받았다. 재미이자 덕질삼아 공부한 커머셜 프로그램에 대해 수정하고 보완하는 작업을 도와준 그녀를 높이 평가한 회사의 결정이었다. 세계 최고의 온라인 커머셜 글로벌 기업 중 하나인 회사로, 누가봐도 망설일 이유가 없는 곳. 그러나 취업이 결정된 후 그녀는 매달리는 재식 때문에 심하게 동요했다.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떠나는 순간까지 자신이 고민할 것이라는 걸 그녀는 알았다. 자꾸 돌아보게 만드는 그 때문에 그녀는 수없이 흔들렸다. 머리와 가슴이 모두 아팠다.


결정을 해야 하는 날, 늦게 까지 회사에 있던 그녀는  습관처럼 서랍을 열어 붉은 담배갑을 꺼내 쥐었다. 책상 위에 던져둔 미국 회사의 자료가 눈에 들어왔다. 아프리카 밀림을 헤치듯 공격적으로 창업에 성공한 대표, 그 사진이 무척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머릿속을 명확히 스치는 장면이 있었다. 강릉 서낭당에서 본 할머니의 얼굴, 그 얼굴이 대표의 얼굴 안에 섞여 있었다. 그녀는 설마하는 기분으로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


흡연부스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었다. 세대째 담배를 태운 영선은 오랜만의 흡연에 속이 매슥거렸다. 커피를 사서 게이트 의자에 앉았다. 비행기표와 여권을 손에 쥐었다. 비행기에 올라 와인을 마시고, 푹 한잠 자고 일어날 것이다. 재미없는 영화는 보지 않을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하고, 택시를 타고 바로 마운틴뷰의 숙소에서 짐을 풀게 될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도착한 그곳에선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길, 무엇보다 자신을 신뢰할 수 있게 되길.


가방을 열기 위해 몸을 움직인 영선의 옆에 붉은 담배갑과 핸드폰이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주워 올린 스마트폰엔 재식이 건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가득했다.


- 돌아와. 그리고 나를 다시 봐줘. 넌 그럴거야.’


탑승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영선은 스무 개 중 세 개피가 비어있는 새로산 담배갑을 손에 꼭 쥐고 납작하게 구겼다.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그녀는 스마트폰의 메시지를 무심히 지운 후 전원을 껐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탑승구를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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