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으로 난 실험실의 말간 유리창으로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졸음에 겨운 경비의 신발끄는 소리가 열린 문 앞에서 멈췄다. 그는 놀라 주춤거리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전화기를 찾는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붉은 피가 불확정의 곡면 도형처럼 입혀진 타일바닥엔 눈을 부릅뜬 가운차림의 연구원이 모로 누워 있었다. 그 옆의 나도 두툼한 피범벅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피투성이가 되어 밤새 연구실바닥에 나란히 누워있었다. 그의 숨결은 정확히 밤 11시 26분에 사라졌다. 북극성이 창틀 너머로 사라지고 말간 샛별이 보이기 시작하던 시간이었다.
*
주먹 만한 샤워볼에 비누를 문질러 거품을 낸다. 그 거품으로 온몸을 꼼꼼히 닦아냈다. 영화속의 한 장면처럼 그녀는 거품이 묻은 몸을 거울에 비추며 과장되게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지만 11자 복근이 잡힌 납작한 아랫배는 그녀의 자부심이었다. 그건 그녀와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 같은 것이다. 그녀는 향이 없고 성분이 심플한 스위스 회사의 로션을 얼굴과 몸에 바른다. 비누를 제외하곤 심플한 무향제품을 쓰는 그녀에겐 비누 냄새가 체취처럼 남아 있다. 나와 체취가 같은 그녀,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 그녀를 내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다이알 비누다. '골드'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어있지만 사실 아무관계 없는 그저 노랑 염료를 사용한 제품에 지나지 않는다. 싸구려라고 얕잡아보는 사람도 많지만, 그래 뭐 다 좋다. 아름답고 사랑스런 그녀가 나를 애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100개가 든 커다란 덕용박스로 그녀에게 배달되었다. 나는 집과 일터, 그녀의 손이 닿는 곳에 모두 놓였다.
“크레졸 비누 쓰지. 왠 다이알?”
인상 좋은 중년의 교수는 그녀가 가져온 나를 보며 썰렁한 농담을 하곤 혼자 신나는 표정을 지었다. 20대의 그녀가 ‘왠 다이알’같은 농담을 알아들을 리가 없다.
“제일 깨끗하게 닦이는 비누에요. 향이 너무 좋아요.”
아, 사랑스런 여인이여! 나를 사랑하는 당신같은 여인에 내 몸을 갈아바칠 자격이 있다. 같은 체취를 갖고 있는 우리는 하나다.
그녀의 전공은 생화학이었다. 석사 과정을 마친 그녀는 박사학위를 위해 다른 대학으로 갔다. 전공 분야에서 ‘유명한’ 그 유명한 교수를 따라 이곳에 입학 한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비와 연구비를 위해 교수의 연구실과 실험실에서 일을 했다. 그러나 유명한 교수의 연구실은 자대 학생들도 극도로 꺼리는 곳이었다. 교수의 연구주제 물질 때문이었다. 호르몬 제제인 D-38은 탈모와 비만을 한 번에 잡을 수 있는 획기적인 융합물이었다. 언론에서도 기획기사로 따로 보도할 만큼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물질에 대한 실험과 합성이 끝나면 엄청난 부를 안겨줄 수도 있는 물질이라고 했다.
“실험실 일해도 되는거야? 알잖아 D-38 피부나 호흡기 흡수 될 수 있다는 걸.”
“장비 잘 착용하고 조심하면 되겠지.”
동기의 걱정에 그녀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그녀는 일단 자신의 논문주제와 관련이 있지만 아닌 실험실에, 자대 학생들도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그곳에 홀로 드나들게 되었다. 첫 출근에서 그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다용도실에 든 나를 몇 개 집어 가방에 넣었다. 출근길 내내 비누냄새를 큼큼대며 맡는 사랑스런 얼굴을 보며 흐뭇해졌다. 그녀는 나를 실험실과 사무실 세면대, 화장실 등 곳곳에 놓고 수시로 손을 깨끗이 닦았다. 실험실에 들어가며 보호복과 장비를 꼼꼼히 챙기는 그녀가 안쓰럽기도 했다. 비누거품을 풍성하게 만든뒤 세척용 솔로 손톱아래까지 꼼꼼히 닦는 그녀를 위해 나는 남은 세균들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연구가 진행될수록 그녀가 실험실에 남아서 지켜봐야 할 것들이 늘어났다. 실험실 체류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고무마스크는 일회용으로 급히 사용할 때가 많았고, 보호복대신 가운을 걸치고 드나드는 날이 많아졌다. 실험실과 사무실엔 거의 그녀 혼자 있을때가 많아서 아무도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두세번 유명한 교수는 거의 우주인 같은 뚱한 모습으로 보호장구를 착용하고 실험실을 들어와 진행을 체크했다. 그 옆의 가운만 걸친 그녀의 모습에 나는 분노했다. 이건 아니었다.
“이상해. 계속 어지럽고 얼굴에 뭐가 나. 탈모도 심해졌고. 피부도.. 이렇게 건조하고 얇아졌어.”
사무실에서 동기와 제육볶음을 시켜먹으며 그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젓가락을 내려 놓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 친구는 팔짱을 끼고 있다가 세면대에 묵묵히 시선을 주었다.
“저거 때문이야. 다이알 비누. 피부엔 저런 알칼리비누가 최악인거 알잖아.”
둘은 마주보고 소리 내어 웃었지만 나는 화가 났다. 그녀를 깨끗이 하는 일에 내가 얼마나 최선을 다 하고 있는지 아는가.
“무슨 소리야. 비누 중에 다이알 골드만한 게 없어. 깨끗이 손을 씻고 있는 덕택에 버티고 있는지도 몰라.”
역시, 내 사랑 그녀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더욱 슬퍼 보였다. 모두가 공범으로 느껴졌다. 위험한 연구에 그녀 홀로 남겨놓는 사람들.
밤샘이 잦은 그녀는 코피도 많이 흘렸다. 그녀는 계속해서 교수의 논문과 보고서를 써야했다. 실험 데이터를 가장 잘 알고 있으니 보고서 정리도 그녀가 가장 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분기에 진행하는 교수의 논문 대부분도 그녀가 쓰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화가 났다. 그래도 틈틈이 자신의 연구를 진행하며 논문을 썼다.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여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녀의 논문은 화학물질과 연구기계에 관한 것이었다. 많은 일을 하며 그녀의 얼굴은 점점 파리해져 갔다. 시간은 착실히 흘렀고, 어느덧 그녀의 논문도, 연구실 생활도 마무리되어 갔다. 힘든 시간이 지나 학위를 받고 이곳을 벗어나면 그녀의 생활은 나아질 터였다. 나는 그날이 빨리 오길 고대했다. 박스 속 내가 사라지기전 나는 그녀가 이곳을 벗어나는 걸 보고 싶었다.
“이번엔 통과가 힘들 것 같네. 문제가 많아.”
냉정을 지키던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수정이나 보완할 부분 알려주시면 최선을 다해 정리해보겠습니다. 어느부분이 마음에 안드시는 거죠?”
교수는 테이블 앞에 놓인 음료수를 벌컥대며 들이키고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부 다라네. 나도 유감이야.”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팔짱을 낀 채 그녀를 지켜보던 그는 흘러내리지도 않은 안경을 올리며 헛기침을 했다.
“내년엔 꼭 통과할 수 있게 하자고. 그리고 올해 1년 더, 연구실 근무 부탁하네.”
그녀는 파리해진 얼굴로 교수를 쳐다보았다. 마른 몸과 성성하게 빠진 머리가 한눈에도 건강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온 몸이 쪼개지는 느낌이었다. 비누가 쪼개지면 금방 말라붙어 버리는 이유는 우리의 고통 때문이다. 아주 작아져서 그저 거품으로 사라질 때를 지켜봐주는 사람들에게 제일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비누에 대한 예의를 아는.
“아 진짜 너무 한다. 네 논문 갖고 꼬투리를 잡냐? 그런 충실한 논문이 어딨다고.”
치킨과 술을 한가득 싸들고 온 그녀의 친구는 그녀의 부당함을 온몸으로 분노하듯 열정적으로 치킨과 맥주를 먹고 마셨다. 그녀는 기름진 치킨을 먹지 못했는데 최근 들어 위장이 안 좋아진 탓이었다. 구토도 잦았다. 나는 그녀가 진심으로 걱정되었다.
“어떻게 하냐. 한 학기 더 버텨봐야지.”
“D-38이라며. 검진이라도 받아봐. 학교에다 해달라고 해.”
그녀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6개월 후, 수정 보완을 마친 그녀의 논문은 역시 통과하지 못했다. 비누거품에 싸인 그녀의 몸은 앙상하게 말라갔다. 병색이 짙어진 그녀는 다음날, 연구소 사무실에서 쓰러졌고 병원에 입원했다. 그제서야 그녀는 건강검진이라는 걸 할 수 있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림프암이라고 했다. 모두들 쉬쉬하긴 했지만 그녀의 증상이 D-38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은 모두 인정하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쪼개질 것 같았다. 실제로 그녀 없는 연구실과 실험실에서 나는 쩍쩍 쪼개지며 말라가고 있었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비누, 물때가 끼고 말라 쓰레기통에 버려지기 전에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그날 오후, 유명한 교수가 실험실에 왔다. 장비와 약품이 정리된 실험실엔 그녀가 쓰던 컴퓨터만 남아 있었다. 유명한 교수는 그녀가 공들여 실험하고 정리한 보고서와 데이터들을 자신의 메일로 보냈다.
“칠칠치 못한 녀석, 이런 건 다 정리해서 주고 입원해야 할 거 아냐.”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세면대 앞으로 와 말라버린 비누를 들고 인상을 썼다.
“이런 싸구려 비누나 갖다놓고.”
따뜻한 물로 충분히 불린 후에 거품을 듬뿍 낸 그는 손톱아래까지 꼼꼼히 손을 씻었다. 종이타월로 물기를 제거한 그는 자신의 얼굴과 머리를 매만졌다. 그래, 기회는 이때다! 오래간만에 몸에 물기를 듬뿍 머금고 물러진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비누갑에서 튀어 올라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자켓을 여미고 실험실을 나서는 그의 발을 앞질렀다. 그의 오른 발이 나의 몸에 닿는 순간, 그는 뒤로 나동그라졌다.
유난히 큰 그의 머리는, 그래서 천재라고, 부모님과 주변의 기대를 더욱 부풀린 그 커다란 짱구머리 뒤통수는, 날카로운 실험대의 모서리를 찍고 그대로 타일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의 발에 채인 나는 깨진 그의 뒤통수 옆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천정을 보고 누운 그의 머리에서 붉고 끈적한 액체가 천천히 배어나와 내 황금빛 몸을 적셨다. 주변의 다양한 사고들이 모두 우연같은가? 세상에 우연한 사고란 없다. 원인이 된 물질을 눈여겨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살아있는 생물이 아니더라도 물건의 마음을, 그들이 인간에게 품은 에너지를 소홀히 여겨선 안 되는 법이다.
그녀가 좋아하는 나의 향기에 유교수의 피비린내 따위가 섞여들어가도 그녀는 나를 아는 척 해줄까?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지만 씻어내면 된다고, 그것이 비누의 본질이라고 그녀는 웃으며 말해줄 것 같았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병동에도 함께 하고 싶지만 아직도 그녀는 비누같은 소소한 것을 신경 쓸 수 있을 만큼 삶의 의지가 남아 있을까.
온 몸이 녹아 그대로 사라질 것 같은 아픈 슬픔이 다시 몰려왔다.
그녀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