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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시딘 Sep 03. 2020

모든 창작 활동이 예술이 된다는 건 좀 나이브 했다

- 김봉곤 <여름, 스피드>


모든 창작활동이 예술이 된다는 건 좀 나이브 했다.

(‘컬리지 포크’ p9)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 등단작 ‘Auto’부터 <여름, 스피드> 그리고 최근에 나온 <시절과 기분>- 이 책은 판매 중지로 보지 못했는데, 사실 안봐도 어떤 내용인지 알 것 같은 느낌이다.- 까지 그의 소설은 일관되게 성소수자인 주인공의 사랑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젊은 주인공은 우연한 만남보다 자신의 의지를 담은 ‘데이팅 앱’을 통해 연인을 만나고 사랑하고 이별한다. 가볍지만 보다 은밀한 느낌, 주인공에게 깊은 상흔을 남기며 비명을 지르고 더 깊이 빠져들게 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성소수자, 소위 말하는 게이 커플이기 때문이다. 섹스라는 구체적인 목적을 갖고 만나는 그들은, 집유등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타오르고 사랑하고, 결국엔 이별하고 만다.


2018년에 시작되었던 것 같다. 한국 문학의 다양성 시대를 이야기 하며 거론되던 것이 바로 ‘퀴어’와 ‘페미니즘’이었다. 장르문학의 시대가 되었고 SF장르를 순문학계에서 끌어안기 시작하면서 외연이 확장되었다. 그러나 다양성의 시대에 문학에 대한 이목이 지겨울 만큼 저 두가지 소재로 주목된 듯 했다. 두 소재는 이제 더 이상 (적어도 나에겐) 새롭지 않게 느껴진다. 이제는 좀 퇴색되었지만 소재의 신선함에 비해 사실, 작품 자체로는 주목할 만한 것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82년생 김지영>의, 그것도 내용보다는 '비현실적인 책의 상업적 성공 '정도가 이채롭게 느껴졌다고 할까.


퀴어 문학은 더하다. 젊은 작가계의 선두주자로 박상영과 김봉곤 작가가 거론되었다. 박상영 작가의 소설엔 그들의 사랑을 보편적인 느낌의 사랑으로 바라보려는 시각와 작가 자신의 사랑에 대한 객관적 시선이 느껴졌다. 이에 대해 김봉곤 작가 또한 인터뷰에서 “박상영 작가의 페이소스가 조금 더 사회적이라면 저는 내밀하고 서정적인 감정의 결을 쓰는 작가로 달라지고 있다”(채널예스 2020 5월호 인터뷰)고 말하고 있다. 


후에 알려졌지만(사실 자전적 소설이라고 해도 본인이 인정하지 않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할 뿐이지만, 본인도 인정하고, 당사자까지 나오며 일이 커진 느낌이다) 완전한 자전적 소설을 쓰는 김봉곤 작가의 소설들은 읽는 내내 주인공과 프로필의 작가가 겹쳐지며 불편했다. 섹스신을 읽을 때 그 불편함은 배가 되었다. 아, 나는 퀴어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지 못한 옛날사람이라고 해도 별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의 SNS를 훔쳐보듯, 은밀한 일기장을 읽는 느낌은 그닥 유쾌하지 않았다.


사적 대화를 인용하고 실제 인물과의 이야기가 글에 사용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기 전에도 별로 탐탁치 않았던 소설들은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더욱 곱게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런 일은 한국 문학사에서 흔한 일이었다. 당사자의 양해는커녕, 치부를 드러내며 소문을 키우는 일이 허다했다. 이는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신비감과 경외심에 의해 그저 ‘그럴 수도 있는 일’로 여겨졌다. 가십거리로 전락한 소설 속 실존 인물의 명예와 사생활 따위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실제 소설가의 생활에 실린 그의 섹스 판타지와 거창한 예술론은 그저 쓴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어떤 소재를 다룬 소설이라도 우리가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그 안에 ‘보편적인’ 공감을 도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이 사랑을 위해 존재하는 한 남자의 거대한 자의식에 나는 별로 공감 할 수 없었다. 거부감이 느껴질만큼 그가 자신이 가진 특유의 소재를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주변인들과의 실제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동참시키며 말이다. 예술 해석에서 작가론은 기본이고, 사실 작가와 작품은 아주 긴밀해서 ‘작가가 작품이다’라는 극단적인 의견에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공감할 수 없는 작품이 이렇게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을 때,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본 것 같은 찝찝함과 은밀한 흥미로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친구가 말한 그 느낌, 김봉곤의 소설을 자신은 ‘길티 플레져’처럼 읽는다는 그 말의 뜻을 알 것 같았다.

금기되고 은폐되어 온 사랑을 관음하는 느낌.


누군가는 ‘아름답다’고 표현한 문장은 소설에 대한 관음에 은밀한 맛을 더한다. 이런 문장이 사실 꽤 별로다. SNS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의 그저 주렁주렁한 외형에 치중한 문장들은 작가의, 아니 그와 같은 인물로 자꾸만 혼동되는 주인공의 허세만을 보여줄 뿐이다. 소설 속 주인공이 자주 거론하는 롤랑 바르트의 영향인지, 아니면 의식의 흐름대로 쓴 문장인지 작가가 의도한 문장이겠지만 자동기술법과 같은 문장들은 계속 눈에 거슬렸다.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랑거리도 못될 사소한 기쁨을 부모님과 친구와는 공유할 수 없고 공유하기 싫은 그런 것들을 말할 수 없는 적막함. 망연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 마음을 가누어 억눌러야 했을 때, 나는 당황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있다! 있었다. p174



문학이란 이름하에 나에겐 길티 플레져도 아닌 소설, 구설수로 관음이 되어버린 문학, 퀴어에 되려 염증을 느끼게 만든 작품. 작가의 퀴어적 섹스판타지가 아닌 퀴어 문학의 보다 보편적인 감수성을 기대한다. 이 소설에 드러난 그들만의 용어, 감수성, 그리고 그 세계를 알고 싶지 않다.


나는 어찌도 이렇게까지 나인가, 어쩜 이렇게 또 나인가.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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