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생애 첫 썸이었던걸까?
사무라이 쇼다운 시리즈의 4번째 작품, 아마쿠사 강림이 발매되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동전을 넣고 화면을 보는 순간 당황했다. 사무라이 쇼다운 1편과 2편에서 주 캐릭터였던 시라누이 겐안. 3편에서 등장하지 않는 바람에 모르는 캐릭터들로 하느라 고생했는데, 이번에도 등장하지 않은 것이다. 이쯤 되면 개발사에서 겐안을 비인기 캐릭터로 확정 지은 것이 분명했다. 이제 어쩌지… 어떤 캐릭터를 주 캐릭터로 정해야 할까? 다행히 이번 게임은 캐릭터 선택 창에 ‘랜덤’ 버튼이 있었다. 일단 게임 시스템에 익숙해지기 위해 당분간 랜덤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몇 주가 지나 게임에 익숙해질 무렵, 시내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데 옆 자리에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앉았다. 그리고 동전을 넣더니 도전을 하는 것이 아닌가? 격투 게임 인생 5년 차에 여성 게이머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나는 동네 짱. 여유롭게 실력 좀 볼까 싶었는데, 비참하게 패배했다. 어라? 이게 아닌데… 서너 번 도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상대 캐릭터는 소게츠였다. 이후 시내 오락실에 갈 때마다 그 아이가 있었다. 다른 사람이 할 때는 도전하지 않는데, 꼭 내가 게임을 시작하면 옆에 와서 도전을 걸었고 나를 쓰러뜨렸다. 뭐야 이건? 시비 거는 건가? 한 번은 교복을 입은 여고생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와서는 나를 쓰러뜨렸다. 분했다. 어떻게든 그 여자애를 이기고 싶었다. 그렇게 연습하다 보니 결국 그녀와 비등비등한 수준이 되었다.
한동안 승리와 패배를 번갈아 하던 어느 날, 소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나는 고3, 그 아이는 고2였다. 근처에 있는 여고에 다닌다고 했다. 이름은 적당히 ‘천초’라고 하자. 사무라이 쇼다운 4 이외의 다른 게임은 전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왜 이 게임만 하는 거야? 소게츠한테 반했거든. 그것만으로 격투 게임을? 아무 기본도 없는데 이 정도까지 잘한다고? 왜 맨날 랜덤으로 하냐며 진짜 주 캐릭터는 누구냐고 묻길래,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했다. 오빠, 근육질 남자 캐릭터는 하지 마. 왜? 오빠랑 이미지가 너무 달라. 그 말에 발끈한 나는 가장 작은 캐릭터인 리무루루를 선택했고, 의외로 내 스타일에 가장 잘 맞는 캐릭터였음을 알게 되었다.
‘천초’는 소게츠라는 캐릭터에게 일편단심이었다. 그래서인지 사무라이 쇼다운 4만 했다. 내가 다른 게임을 하면 뒤에서 구경하기에 같이 하자고 가르쳐 주겠다고 권유했지만, 거절당했다. 종종 같이 라면을 먹거나 군것질을 하기도 했다. 내가 일하는 게임 매장 앞에서 기다리다가 퇴근길에 함께 돌아가기는 일도 있었다. 의외로 애니메이션도 좋아했는데, 덕분에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 천초가 코스프레를 하자고 제안했다. 코스프레? 한국에서도 그걸 해? 근데 둘이서 뭐 하려 해? 캐릭터 복장 입고 오락실에라도 가려고? 알고 보니 자신이 나가는 만화 동아리에서 코스프레 사진을 찍는 행사가 있다고 했다. 옷 만드는 것 어렵지 않냐? 나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오빠가 하겠다면 내가 만들어 줄게. 혼자 나가기는 뻘쭘하거든. 뭐 그렇다면 좋아. 한번 해보지 뭐. 그렇게 얼떨결에 코스프레를 함께 하게 되었다.
몇 주가 지나고 오락실에서 만난 천초가 같이 어디를 좀 가자고 했다. 새로운 오락실이 생겼나 싶은 생각에 별생각 없이 따라가는데,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김밥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주인아주머니에게 열쇠를 받아서 나왔다. 여기는 뭐야? 응, 우리 가게. 엥? 김밥집에서 서너 번째 위치한 건물로 쏙 들어가는 천초.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혈기왕성한 고등학생 남녀가 단 둘이 한 집에 들어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무슨 상상을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옷부터 벗어야 했다. 코스프레 옷을 입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만들던 옷이 1차 완성되었고, 사이즈를 확인하기 위해 부른 것이었다. 그런데 이 옷은...
“엥? 뭐야, 이거 신선조잖아?”
“근육질이 아니어도 덩치가 크지 않아도 옷이 다 가려주니까!”
“아니, 잠깐, 넌 소게츠라며, 사무라이 쇼다운에 웬 신선조?”
“대충 시대는 맞잖아. 신선조에 오빠처럼 작고 마른 캐릭터도 있어.”
그렇게 사이즈만 재고 나왔다. 집 안에 게임기라도 있었으면 더 있었겠지만, 놀거리가 없었다. 나오는 길에 천초는 나를 데리고 김밥집으로 들어갔다. 아까는 아주머니 혼자 계셨는데, 이번에는 웬 아저씨가 술을 마시고 계셨다. 천초가 나를 두 분께 소개했다. 우리 아빠랑 엄마야. 그 말에 아저씨가 나에게 술을 권했다. 우리 딸 아직 고등학생인데 벌써 남자를 다 데리고 오네, 한잔 할래? 저 아직 미성년자라서 술은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다시 몇 주가 지난 주말. 천초와 함께 옷을 챙겨 들고 근처 유원지로 향했다. 코스프레 촬영은 처음이라서 두근두근 했다. 그런데... 모델은 천초와 나 둘 뿐. 사진을 찍는 사람은 천초와 같은 학교 친구 두 명. 좀 더 많은 인원이 오는 줄 알았는데, 적잖이 실망했다. 학교 친구 두 명을 소개받은 이후, 천초는 나를 자기 학교 앞으로 종종 불러냈다. 여고 앞에서 혼자 기다리는 시간은 매우 뻘쭘했기에 매번 휴대용 게임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천초를 만날 때면 주위 여고생들이 꺄아 꺄아 거리며 애인인가 봐 따위의 소리를 했다. 우리는 전혀 그런 사이가 아닌데. 쟤는 인간 남자에게 관심 없어. 소게츠 일편단심이라고.
이후 사무라이 쇼다운 4의 인기가 줄어들며 천초가 오락실에 점점 덜 오게 되었고 덩달아 우리의 만남도 줄어들었다. 그러게 다른 게임도 좀 배웠어야지.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겨울날. 한참 게임을 하고 있는데 천초가 들어와서 옆에 앉았다. 오빠, 주말에 시간 좀 낼 수 있어? 코스프레 사진, 한 번만 더 찍자. 뜬금없는 말에 의아했다. 지난번 촬영이 그리 좋지 못한 기억이기에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거듭되는 부탁에 결국 수락해야만 했다. 내년이면 자기도 고 3이니 보기 힘들 거라고 추억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현재 고 3인 나는 수능 직전인데도 여전히 오락실에서 이러고 있는데... 나보다 낫군. 부끄러워졌다. 그렇게 주말에 코스프레 사진을 찍으러 나갔다. 생애 두 번째 코스프레 촬영이었다. 천초와 둘만의 기념 촬영을 상상했는데, 열명이 넘는 신선조 복장의 남자들이 있었다. 얼떨결에 십여 명이나 되는 신선조 팀 코스프레의 일원이 되어 그날 하루종일 사진을 찍었다. 이 그룹에서 유일한 아는 사람인 천초는 다른 신선조들과 웃고 떠들고 있었다. 이 날은 그녀 역시 신선조 복장이었다. 소게츠는 어쩌고!
다음 해, 나는 대학생이 되었고 천초는 고3이 되었다. 시내 오락실에서 더 이상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당시에는 휴대폰도, 인터넷도 없는 시절이었기에 집에 찾아가거나 학교 앞에서 기다리지 않는 이상 만날 방법이 없었다. 사진을 받으러 한 번은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어쩐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고 그렇게 천초와의 인연은 끊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구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후에도 몇 번인가 코스프레를 했지만 옷을 직접 만들지 않는 사람이 오래 유지할 취미는 아니었다. 오래도록 그녀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이렇게 추억을 돌이키며 글을 쓰다 보니 어쩌면 내 인생의 첫 번째 썸이 아니었을까 싶다.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십 수년이 지나 30대가 된 내가 사귀게 된 여성은 나름 유명인이었다. 매달 열리는 만화 행사에 인기 부스로 참가하는 여성이었으니까. 행사를 도우러 갈 때마다 코스프레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여 옛 생각이 떠올랐다.
“나 옛날에 했었는데, 다시 코스프레해볼까?”
“오빠가? 관둬. 키가 큰 것도 아니고 잘생기거나 몸이 좋지도 않잖아?”
“역시 좀 그런가…”
또다시 수년이 지나 이번에는 지역에서 유명한 코스튬 플레이어 여성과 사귀게 되었다. 그녀의 코스프레를 보면서 또다시 옛 생각이 떠올랐다.
“나 옛날에 했었는데, 나도 같이 코스프레할까?”
“오빠가? 관둬. 키가 큰 것도 아니고 잘생기거나 몸이 좋지도 않잖아?”
“역지 좀 그런가…”
결국 두 연인 모두 말리는 이유는 비슷했다. 키도 작고 못생겼고 몸도 별로야. 괜히 인터넷에 사진이 올라가서 놀림거리만 될 거라고 했다. 그렇게 코스프레는 포기했다.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글을 쓰며 돌이켜보니 천초는 정 반대였다.
“나보고 코스프레를 하라고? 키도 작고 못생기고 근육질도 아닌데?”
“신선조 복장은 몸을 다 가리니까 괜찮아. 그중에 키 작은 캐릭터도 있거든.”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한번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