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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도박 묵시록 마이즈

이길 수도 없고 이겨서도 안되는 포커판

by 마이즈 Feb 13. 2025

입사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선임 연구원으로 진급한 날이었다. 나를 비롯한 진급자들 축하를 이유로 회식이 잡혔다. 불 족발을 먹으러 간다고 했다. 불 족발은 뭐지? 뜨거운 족발인가? 매운 족발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 팀장님이 이상한 질문을 하셨다.


“마이즈, 너 포커 좀 치냐?”

“포커요? 포커 종류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규칙은 압니다.”

“그래? 그럼 오늘 회식 끝나고 남아라. 중간에 도망치지 말고.”


신신당부하셨지만 그날도 도망쳤다. 과한 술자리는 불편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회사에 가서 일을 더 하는 편이 낫지. 도망자 무리에는 오타쿠 동료인 연좌와 맹우 조 군도 함께였고 여직원들도 두어 명 있었다. 전철역으로 향하던 중 새로 생긴 아이스크림 가게가 눈에 띄었다. 저거 먹고 가요! 여직원들의 제안에 핑크 빛 아이스크림 가게로 들어갔다. 술자리보다 훨씬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그게 실수였을 줄이야. 통유리창 때문에 술자리가 끝나고 택시를 잡던 팀장님에게 딱 걸린 것이다.


“너네 뭐 하냐? 야, 본부장님 집에서 3차 할 거야. 따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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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직원들이 단호히 거부하자 팀장님은 나와 연좌만 끌고 가면 되니 나머지는 가도 좋다고 했다. 아니 나는 왜? 아 맞다. 진급했지. 어쩔 수 없이 팀장님과 함께 택시에 올랐다. 한참을 지나 내린 장소는 비싸기로 유명한 고층 건물이었다. 와 여기에 사신다고? 역시 대기업 본부장쯤 되면 벌이가 장난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팀장님 말로는 심지어 인센티브로 받은 건물이라고 했다. 헐... 인센티브라니 그거 전설에나 나오는 거 아니었나요? 내가 오버하며 놀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연좌가 웃으며 덧붙였다. 본부장님은 게임을 연달아 성공시키셔서 아파트도 받고 고급 차도 받고 엄청 아름다운 아내분도 생기셨어. 무언가 이상한 이야기가 섞인 것 같아 진짜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성공한 게임 개발자의 삶이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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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대의 택시에서 우리 본부 사람들이 내렸다. 10명 정도가 순차적으로 내리니 무슨 조직 같아 보였다. 본부장님은 먼저 집으로 올라가셨다. 나머지는 다 같이 편의점으로 향했다. 술안주라도 사러 가시나 싶었는데, 모두 현금 인출기 앞에 줄을 섰다. 엥? 뭐지?


“너는 선임이니까 20만 원만 뽑아라.”


서버 팀장 형님이 속삭였다. 연좌도 같은 선임이라서 그런지 20만 원을 인출하고 있었다. 뭐지? 왜 본부장님 집에 올라가면서 돈을 뽑는 거지? 직급이 오르면 상납금 같은 걸 내야 하나? 봉투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아서 일단 만 원짜리 20장을 주머니에 넣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본부장님 집은 밖에서 보기보다 더 넓었다. 큰 탁자에 모두 줄지어 앉았고 아름다운 아내분이 우아하게 인사를 하고는 다른 방으로 들어가셨다. 3차라고 들었는데, 탁자에 술안주는 보이지 않았다. 가벼운 땅콩과 오징어, 과일 조금. 뭐지?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잠시 후 본부장님이 카드를 들고 왔다. 새 트럼프 카드. 능숙하게 포장지를 제거하고 카드를 섞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포커판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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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떨결에 나도 참가하게 되었는데,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용어가 은어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퀸’ 이라던가 ‘하트’나 ‘스페이드’ 같은 용어가 모두 이상하게 변화되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페어’나 ‘스트레이트’ 등의 표현마저 달랐다. 이해하지 못하니 계속 돈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포커 칩으로 게임을 했지만, 알 수 있었다. 이 칩이 현금과 교환될 거라는 것을. 대기업에서 불법 도박을 한다며 분노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잠깐 기다려달라. 조금 더 읽으면 이 포커 판이 그런 노름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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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잃다가 잠시 판에서 빠져 화장실에 갔다. 손을 닦고 있는데, 친한 프로그래머 형님이 따라 들어오셨다. 마이즈, 잘하고 있어. 오늘은 잘해도 못해야 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져드리라는 말이야. 20만 원을 버리라고요? 아니, 20만 원을 투자하면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거야. 잘하면 50~60까지 가능할지도?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하지만 승부에 그런 게 어디 있는가? 시간이 지날수록 용어가 점점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조금씩 승부의 감을 찾아갔다. 초심자의 행운이었을까? 운 좋게 서너 번 연속으로 따게 되었다. 20만 원으로 시작한 돈이 30에 가까워졌다. 그때부터 본부장님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요놈 봐라? 하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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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차례. 핸드에 투 페어가 들어왔다. 이대로도 좋았지만 카드를 교체했다. 풀하우스가 되었다. 표정에 드러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배팅을 이어갔다. 판 돈이 올라가며 한 명 한 명 포기를 선언했다. 결국 본부장님과 나를 포함한 세 사람만이 남았다. 그때 본부장님이 칩을 여러 개 앞으로 밀었다. 잠시 멍해졌다. 뭐지 이건? 저 칩 개수면 200만 원인데? 5천 원에서 갑자기 200만으로 올린다고? 본부장님은 이래도 콜 할 거냐며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풀하우스라고 해도 200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나는 포기를 선언했다. 그때부터 본부장님은 모든 패를 돈으로 찍어 누르셨다. 나는 매번 포기해야 했고 그렇게 게임은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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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임이 끝나고 나서 본부장님은 우리를 다른 방으로 데려가 주셨다. 방 한가운데는 손목시계가 진열장 안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수천만 원짜리 명품 시계라고 했다. 바닥에는 여러 옷 가지와 가방, 벨트, 모자 등이 놓여 있었다. 설명을 듣고 이해했다. 이 물건들은 본부장님의 선물이었다. 모두 명품이었고 모자 하나가 내가 잃은 돈과 같은 금액이었다. 다들 기뻐하며 선물을 골랐다. 나에게도 권유했지만, 그냥 싫었다. 과거도 현재도,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나는 명품의 가치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없이 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딱히 고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무엇보다 나는 본부장님과의 포커 게임에서 패배했다. 이기지도 못한 플레이어가 선물을 받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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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새벽. 귀가하며 연좌와 대화했다. 


“그래도 포커가 낫지. 본부장님이 조금 트렌디하시거든. 최신곡 안무도 외우고 그러다 보니 예전에는 방 잡고 다 같이 춤추는 일도 있었어. 룸을 잡고 술을 엄청 마실 때도 있었지. 그보다 더 심할 때는...”

“그때도 돈을 냈어?”

“비슷해. 하지만 지출한 돈 보다 훨씬 비싼 선물을 받았지."


복잡 미묘한 마음이었다. 본부장님이 직원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면 그냥 주시면 될 텐데 왜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하는 걸까? 반대로 본부장님 의향과 무관하게 직원들이 본부장님을 위해 같이 좋아하시는 춤을 추고 포커 상대가 되는 거라면? 본부장님 입장에서 미안하고 고마워서 직원들에게 선물을 주는 걸까? 아무튼 팀장님은 이 밤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지난 십여 년간 그 약속을 지켜왔다. 하지만, 이제 남아있는 사람이 없으니 글을 남겨본다. 나에게는 특별한 기억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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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이야기는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로 현재의 N사와는 전혀 무관하다. 무엇보다 한 스튜디오의 극히 일부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였음을 밝힌다. 왜 이렇게 조심스럽냐고? 퇴사한 지 오래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나는 N사를 좋아하고 멋진 회사라고 생각하니까. 구성원 몇 사람의 십 수년 지난 이야기만으로 조직 전체를 오해하는 비합리적인 경우는 없었으면 한다. 당시에는 불편한 경험이었지만, 지나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는 것 같다. 조금 더 시야가 넓어졌기 때문일까?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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