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실에서 린치 당했던 추억
고등학교 시절. 나를 좋아해주던 친구가 있었다. 그는 내가 그린 서툰 그림을 좋아해주었고 격투 게임을 하는 모습도 멋지다고 했다. 집이 가까웠기에 종종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헀다. 녀석은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었는데, 선천적이기 보다는 긴장을 과하게 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와 있을 때는 말을 더듬지 않았으니까. 이 친구 이름은 ‘영식’이라고 하자.
그 날도 집에 가는 길에 오락실에 함께 들렀다. 영식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킹 오브 파이터즈를 하고 있는데, 등 뒤가 시끄러웠다. 게임을 끝내고 가보니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꼬마가 용호의 권을 하고 있었다. 온갖 욕을 외치면서. 몇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꼬마는 더 악을 썼고 급기야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기까지 했다. 미친 아이 같았다. 하지만 오락실에는 오락실만의 룰이 있는 법. 동네 짱인 내가 나설 차례였다. 꼬마 옆에 앉아 동전을 넣고 대전을 걸었다. 그리고 욕하는 꼬마를 박살 냈다. 아이는 기판을 쾅쾅 내려치며 분노했다. 여러 번 동전을 넣어 재도전을 했고 매번 소리를 꽥꽥 질러 댔다. 그 탓에 오락실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 주변으로 몰려 들었다. 결국 돈이 떨어졌는지 꼬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욕을 거칠게 내뱉는 아이의 울고 있었다.
“진정해. 그렇게 감정적으로 하면 게임을 잘 할 수 없어. 하지만 지더라도 계속 하더라. 너는 끈기가 있으니 조용히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나는 항상 여기에 있을 테니 언제든지 도전하러 와.”
내 나름대로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다. 영식이가 보고 있어서 더욱 영웅심이 일었던 걸까? 꼬마는 울면서 나갔고 오락실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다시 여기 저기에서 게임 소리만 울렸고 모여들었던 사람들도 흩어졌다. 영식이는 나의 대처가 멋있었다며 자존감을 한껏 치켜세워 주었다. 하지만 그 고양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시 자리를 옮겨 킹 오브 파이터즈를 하는 와중에 누가 툭툭 건들었다. 돌아보니 조금 전의 그 용호의 권 꼬마였다. 곁에는 성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함께 였다. 그가 말했다.
“니가 내 동생한테 조용히 하라고 했냐?”
“진정하고 게임을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 동생을 울렸냐? X새끼야. 따라 나와!”
꼬마와 남자가 먼저 밖으로 나갔다. 곁에 있던 영식이는 이 상황을 마주하고 불안해했다. 하지만 정작 나는 그리 불안하지 않았다. 90년대 아케이드 키드라면 모두 그럴 것이다. 오락실을 다니면 시비가 붙는 일은 드물지 않다. 그럴 때마다 나의 해결책은? 들고 다니던 칼을 잠깐 보여주고 여차하면 한 두 번 휘두르면 된다. 사람을 다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 만으로 싸움은 일어나지 않고 적당히 상황이 정리 될 수 있다. 보통은 미친놈이라며 가거든. 걱정 말라며 당당하게 나섰다. 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고 있던 남자는 옆 건물 화장실로 가자고 했다. 길가에서 칼을 꺼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오히려 좋았다. 꼬마는 먼저 집에 보냈는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영식이를 먼저 보내려고 했지만 남자는 둘 다 따라오라고 했다. 2 vs 1로 싸울 자신이라도 있는 걸까?
옆 건물 화장실의 문을 여는 순간, 망했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그 좁은 화장실 안에 이미 서너 명의 남자들이 있었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도 하나 있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그들은 낄낄대며 누워있는 사람의 팔을 녹색의 날카로운 도구로 긋고 있었다. 소주병을 깨뜨린 유리 조각인 것 같았다. 남자는 주춤하는 우리를 화장실 안으로 우리를 밀어 넣었다. 순간적으로 고민이 되었다. 칼을 꺼내야 할까? 이 상황이라면 단순 위협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죽거나 이 놈들이 죽거나. 옆에는 나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친구가 함께 였다. 중학교 때처럼 비굴하게 고개 숙이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걸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내가 여기에서 죽으면 어머니와 동생은 누가 지킬 것인가. 자존심을 버리자.
그들은 그저 폭력의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화장실에 있는 대 걸래로 때렸지만, 격투 게임으로 동생을 울렸다는 말을 듣고는 맨 주먹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는 복싱을 배운다고 했다. 그들은 우리를 세워두고 격투 게임 기술을 하나 하나 흉내 내며 폭행을 지속했다. 비연 질풍각! 참열권! 용호난무! 그러던 중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람이 의식을 되찾자 그 역시 세워두고 우리 셋을 번갈아 가며 때렸다. 서로 누가 격투 게임 기술을 더 멋지게 잘 흉내 내는지 놀이를 하는 듯 했다.
구타당하는 순간의 느낌은 기묘 헸다.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기 때문일까? 상황으로 인한 압박이 강하기는 했지만, 중학교 시절 일진들의 폭력에 비하면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폭력을 위한 폭행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만족감은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리액션을 크게 했다. 더 크게 몸을 날렸고 그들이 집중할 수 있도록 말을 걸지 않았다. 머리는 더욱 차가워졌다. 친구는 울면서 잘못했습니다, 살려 주세요를 반복했는데, 이는 역효과임이 분명했다. 시끄럽다며 더 때렸으니까. 그렇게 셋 모두 피투성이가 되자 그들은 우리를 바닥에 무릎 꿇렸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울에 원정가서 패싸움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자기들이 지고 돌아와서 구역을 빼앗겼다고. 분풀이 상대가 필요했다며 미안하다는 말까지.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두고 미안하다고? 황당했다. 나중에 만나면 보상해줄 테니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들을 찾으란다. 그러면서 지금 술이 마시고 싶은데 돈이 있으면 빌려달라고 했다. 친구는 가지고 있던 만원짜리 몇 장을 내밀었다. 이름 모를 피해자도 그랬다. 하지만 내가 가진 돈은 동전 몇 개 뿐이었다. 돈이 없다고 하자 그들이 내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라? 이 새끼 이 칼 뭐야? 너 이거 쓰냐? 그런데 왜 그냥 맞은거야? 한 눈에 형님들이 한 수 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변명했는데, 잘 먹힌 것 같았다. 어쩐지 타격감이 좋더라. 처음부터 맞을 자세가 되어 있었구나. 너 마음에 든다. 여기 오락실에 자주 오지? 종종 보자! 나에게 담배를 한 대 건네주고나서 그들은 떠났다.
놈들이 나갈 때 나를 포함한 피해자 셋은 차려 자세로 90도로 숙이며 인사를 했다. 형님 안녕히 가십시오! 무슨 조폭이냐. 그들이 나가자 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주저 앉았다. 화장실 바닥에 누워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긴장이 가라 앉아서인지 그제야 맞은 곳 여기저기가 쑤시고 아팠다. 두루마리 휴지를 풀어 피를 닦았다. 잠시 후, 우리보다 먼저 맞고 있던 남자가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영식이와 나도 조용히 자리를 떴다.
“우…우….우리 집에 가가가가가…가자.”
영식이가 말했다. 내 앞에서는 말을 더듬지 않던 녀석인데, 충격이 컸나 보다. 처음으로 가게 된 영식의 집은 빌라였다. 꼭대기 층. 이 건물이 자기네 거란다. 좀 사는 놈이었구만. 내가 이대로 집에 가면 안될 것 같았단다. 가볍게 피를 씻어내고 상처에는 반찬고를 붙였다. 그 사이에 영식이 라면을 끓었다. 너 만원짜리 라면 먹어본 적 있어? 그렇게 비싼 라면이 있다고? 라면에 치즈 넣으면 치즈 라면이니 500원 추가. 만두 넣으면 또 만두 라면이 되니 500원 추가, 온갖 재료가 들어간 듣도 보도 못한 라면이었다. 자기만의 시그니처 메뉴라며 웃었다.
우리 집에서는 저 재료 하나가 한끼 식사인데… 문득 녀석과 나의 수준 차이를 알 것 같았다. 조금 전 화장실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는 모습도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방에 놓인 고급 PC 도, 거실에 있는 대형 TV도, 나와는 다른 세상의 물건인 것 같았다. 동시에 영식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나와 친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을 당할 아이가 아닌데. 이래서 사람은 수준에 맞는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건가 보다. 그날 이후. 영식이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서로 그랬던 것 같다.
PS...
이후, 동네에서 우연히 그 형들과 마주쳤다. 칼 들고 다니는 놈 아니야? 너 우리랑 같이 좀 가자! 그렇게 불량 그룹에 어영부영 들어가게 되었다. 조직 폭력배 같은 뒷 배가 있는 것인줄 알고 잔뜩 쫄았지만, 그냥 20대 초반 건달끼리의 싸움 그룹일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다시 어둠의 세계로 빠져들 위기에 봉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