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네가 나보다 낫다.
혼자 외국에 나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네다 공항. 아마 녀석도 몇 개월 전에는 나와 같은 심정이었겠지? 짐을 찾고 게이트를 나가니 익숙한 얼굴이 반겼다. 동생이었다. 기차 탈래? 버스 탈래? 아무거나 타자고 대답하니 동생이 안내소에 무언가를 물었다. 일본어이기는 한데, 너무 빨라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유창하게 말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드물었다. 한국어조차도.
초등학교 시절, 동생은 말을 잃었다. 아마 아버지를 공격한 나의 행동에 충격을 받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목소리를 잃은 원인이 나일지도 모른다는 미안함에 더욱 동생에게 집착했다. 녀석을 보호해야만 했다. 마왕이 보낸 자들이 찾아올 때면 동생을 방에 들여보내고 홀로 맞서 싸웠다. (마왕과 어머니) 얻어터질 뿐이었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하던가? 동생은 중학생, 고등학생으로 커가며 점점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필요한 말만 짧게 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던 동생이 어느 날 변했다. 유학을 위해 일본어를 공부하면서 밝은 성격이 된 것이다. 마음속에 묻혀 있던 진짜 모습이 되살아난 것 같았다. 이것이 언어 치료인가?
동생의 집은 혼아쓰키 역에서 한참 더 들어가야 했다. 완전 시골이었다. 집 한쪽은 통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커튼이 닫혀있었다. 내가 보낸 돈으로는 고시원 수준의 작은 방 밖에 못 구할 줄 알았는데, 제법 괜찮았다. 작은 욕실도 있고 주방도 있었다. 시골이라 저렴한 걸까? 몇 개월 만에 한 지붕 아래에서 잠을 잤다. 워낙 말이 없는 녀석이다 보니 대화는 거의 하지 않았다. 잠든 숨소리에 감사했다. 아침이 되어 커튼을 젖혔는데, 바로 앞에 묘지가 있었다. 그랬구나. 어쩐지 저렴하더라 했지.
입을 열기 힘든 동생에게 군복무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공군 연구실에서 근무했는데, 다양한 사람들을 겪으며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번에는 지켜줄 수 없었다. 어른이 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3년간의 군 생활을 훌륭히 마치고 전역했는데, 그동안 받은 급여를 한 푼도 쓰지 않고 모두 저금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주려고 하길래 받을 수 없다고, 알아서 쓰라고 했다. 동생은 어머니를 위한 보약을 지어왔다.
동생의 학교는 내가 꼭 확인해야 할 장소였다. 꿈을 위해 노력하는 장소였으니까. 동경 농업 대학교. 학교 안 쪽으로 출입 금지 구역이 있었는데, 그 안에 다양한 야생 동물을 키우고 있었다. 조류와 어류, 포유류와 파충류에 이어 곤충까지. 이렇게나 좋은 환경에서 다양한 생명에 대해 배우고 연구하고 있구나. 그래서 어떤 걸 전공할 건데? 수달. 일본에서 수달은 멸종 위기인데, 한국에는 개체수가 오히려 늘고 있데. 나는 한국인이니까 수달 연구를 하면 유리할 것 같아.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갈지도 모르고.
군복무 이후. 동생은 서울 대학교 연구실에 채용되었다. 유전 공학 관련 연구를 하던 중, 당시 누구나 알 법한 큰 이슈가 발생했다. 근무처에 문제가 생기며 삼성 의료원 내부에 있는 연구실로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더 잘 된 것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 반대였다. 동생은 그때부터 매일 악몽에 시달렸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느 주말, 실험 쥐에게 밥을 줘야 한대서 연구실에 함께 들르게 되었다. 그곳에서 동생이 힘들어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연구에서는 실험 쥐를 다치게 하거나 오히려 더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다. 심지어 죽는 경우도 많은 것이다. 생명을 누구보다도 아끼는 동생인데, 얼마나 괴로울까. 알면서도 지켜봤다. 이를 극복할 것인지, 포기할 것인지. 어느 날 동생은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어. 유전 공학 말고 생명 공학을 할래.
동생은 나를 학교 인근의 식당으로 안내했다. 저렴해서 자주 오는 곳이라고 했다. 어쩐지 고풍스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시골이니 그러려니 했다. 메뉴 판은 보지도 않았다. 마치 한국의 백반처럼 다양한 반찬이 나온다는 말에 알아서 시켜 달라고 했다. 잠시 후 음식이 하나하나 나오기 시작했는데,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와. 일본은 저렴한 음식도 이렇게 정성을 다 하는구나? 이 정도 조합인데, 얼마야? 메뉴판을 보니 5000이라고 쓰여 있었다. 5000원? 진짜 싸네! 이렇게 저렴하다고? 아! 여기 일본이지? 그럼 가격이... 5000엔이네! 나를 속였구나!
게임 매장에서 받은 첫 월급으로 어머니와 동생에게 속옷을 선물했다. 그리고 새로 생겼다는 조개 구이 집에 갔다. 내가 번 돈으로 하는 첫 외식이었다. (으뜸) 살아있는 조개는 뜨거운 불 판 위에 올려지니 하나씩 입을 다물었다. 열기를 내보내야 할 텐데 왜 입을 닫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조개 구이가 익어가며 닫힌 입이 하나씩 벌어졌다. 이제 먹어볼까 싶은 타이밍에 갑자기 동생이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는 감동해서 그러나 보다 하셨지만, 나는 알았다. 조개가 불쌍해서 울고 있다는 것을. 어머니는 형이 힘들게 번 돈으로 나온 자리에서 뭐 하는 거냐며 한소리 하셨지만, 나는 오히려 미안했다. 싫은 것을 보게 만들었구나. 그리고 보면 어릴 때부터 생명을 중시했지. 도로에 죽은 비둘기나 고양이를 보면 학교도 빠지고 산에 가져가서 묻어 주기도 하고. 위험하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 않았었지.
동생은 나를 데리고 혼아쓰키 전역에 있는 오락실을 순회했다. 너 오락실도 다녀? 아니, 형이 온다고 해서 조사해 봤어. 지역 오락실을 모두 돌아본 뒤에는 아키하바라에 갔다. 여기도 처음이야? 형이 오면 같이 오려고 아껴뒀지. 동생과 함께 여러 오락실과 게임 숍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캡슐 안에 들어가서 조작하는 건담 게임을 발견했다. 서로 다른 캡슐에 들어가서 게임을 시작했는데, 음성 채팅이 되는 것이었다. 동생과 나는 각자 모빌슈츠를 타고 함께 전장을 누볐다. 어린 시절에 함께 게임을 하던 시절처럼 바로 옆에 앉아있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같은 전장에서 서로를 지키며 싸웠다. 요즘은 네트워크가 발달했으니 서로 다른 나라에 떨어져 있더라도 함께 게임은 할 수 있겠다. 한국에도 이 게임이 있다면 좋을 텐데.
나의 취미가 게임이었기에 자연스레 동생도 어릴 때부터 함께 플레이했다. 게임을 구매할 때면 가급적이면 2인용이 되는 게임을 찾았다. 더블 드래곤이나 다람쥐 구조대, 트윈비 같은 협력 게임은 항상 함께 클리어했고, 격투 게임이나 퍼즐 등 경쟁하는 게임도 함께 즐겼다. SRPG를 할 때는 등장하는 캐릭터를 나눠서 컨트롤러를 번갈아 쥐며 게임을 진행하기도 했다. 동생은 이 모든 게임을 ‘우리가 함께 한 모험들’이라고 표현했다. 형제는 수 없이 많은 세계를 구하며 공동의 성취를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바이오 하자드라는 게임을 만나게 되었고, 유전 공학과 생명 과학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게임을 하다가 박사가 된 동생)
동생과 함께 하는 일본에서의 시간은 게임과 애니메이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온다는 말에 동생이 치밀하게 준비해 둔 덕분이다. 미리 예약해야만 갈 수 있다는 캡콤 바에 가서 몬스터 헌터 고기와 바이오 하자드 케이크를 먹었다. 지브리 박물관과 건담 카페도 함께 다녀왔다. 영화관에 가서 베르세르크 극장판을 함께 감상했다. 나를 위해 하나하나 찾고 준비해 두었다는 사실에 감동하는 한편 미안했다. 전문 용어 탓에 수업을 알아듣기 힘들어 매일 녹음해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듣는다고 했었는데... 나 때문에 공부할 시간을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나중 이야기지만 동생은 일본에서도 장학금을 받으며 박사 공부를 마쳤으니까. 역시 나보다 네가 낫다.
하나 둘 셋 유치원에 다니던 아주 어린 시절. 일본 할아버지가 장난감 선물을 하나 주셨다. 그렌다이저였다. 왜 하나밖에 없냐는 질문에 합체 분리가 되는 것이니 동생과 나누라고 하셨다. 그 말이 맞긴 했다. 그렌다이저는 로봇과 비행기로 분리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어린아이라면 누구나 로봇을 갖고 싶은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내 마음을 알아챈 것인지 눈치만 보고 있던 나에게 동생이 양보했다. 비행기 부분을 가져간 것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이었지만 그때 결심했다. 로봇을 양보한 은혜는 평생 갚을 거야!
동생과 함께 간 아키하바라에는 3DS 체험 존이 있었다. 안경을 쓰지 않고 볼 수 있는 입체 영상도 신기했지만 그 보다 좋은 것은 네트워크 기능이었다. 이 게임기라면 한국과 일본에 각각 떨어져 있어도 함께 게임을 할 수 있겠다. 실은 게임기가 없더라도 PC로 온라인 게임을 할 수 있었지만, 동생에게 PC를 사줄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녀석은 학교 PC를 사용했다. 이 게임기, 내년 생일 선물로 형이 사 줄게. 직접 만나기는 힘들더라도 게임에서 자주 만나자. 우리의 추억은 PC보다는 콘솔 게임에 많았기에 더욱 기대되었다. 이 게임기와 연관된 가슴 아픈 사건이 생길 것임은 이 당시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집이 어려워지며 우애는 더욱 강해졌다. 먹을 것이 있으면 남겨두었다가 함께 먹었다. 내가 밖에서 먹고 왔다고 거짓말하면 동생은 귀신처럼 알아챘다. 치킨을 시켜 먹을 때면 서로에게 큰 조각을 주기 위해 앞다투어 작은 조각부터 집어먹었다. 돈이 생기면 꼭 절반 이상을 상대에게 건넸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우리는 항상 같은 마음이었다. 나는 여전히 부채감을 갖고 있었다. 나의 충동 때문에 말을 잃었었고, 나의 무능력 때문에 좋은 대학에 갈 기회를 잃었다. (평화로운 대학생활) 어린 시절에도 게임을 좋아하는 나를 따라다니느라 진짜 취향을 찾지 못한 것은 아닐까? 자신의 욕구를 말하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동생이 원한다면 무조건 해주려고 노력했다. 친구들은 동생이 아니라 아들 같다는 말도 한다. 어쩌면 비슷할 지도 모르겠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오다이바에 있는 대 관람차였다. 한 밤의 레인보우 브리지를 바라보며 동생과 함께 관람차에 올랐다. 완벽한 여행이었다. 동생이 나를 위해 준비한 선물 같았다. 말을 잃은 초등학교 시절. 동생은 세상에서 단 한 사람에게만 입을 열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닌 나였다. 학교에서 폭력의 대상이 된 끝에 나쁜 일에 손을 대며 어떻게든 돈을 벌기 위해 고군 분투 하던 시절, 동생이 학교 과제로 한 글짓기를 보게 되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이라는 제목이었다. 당연히 외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고 지나치는데 ‘형’이라는 한 글자가 언뜻 비쳤다. 초등학생인 동생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는 사람은 엉망진창으로 살고 있는 나였다. 극심한 공포가 느껴졌다. 내가 대충 살게 되면 동생마저 나처럼 될지도 모른다.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겠다. 공항까지 배웅 나온 동생에게 묻고 싶었다. 네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여전히 형이니? 그 질문은 끝내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하지만 몇 년 뒤, 동생의 결혼식에서 본인의 입으로 그 답을 듣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 동생에게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남기며 상위 안쪽 주머니를 보라고 했다. 공항에서 동생이 화장실에 간 사이 안주머니에 몰래 돈 봉투를 넣어 두었다. 그냥 주면 절대 받지 않을 테니까. 그러자 동생이 답변을 했다. 형도 가방 제일 앞 칸을 열어봐. 돈 봉투가 들어 있었다. 어떻게 둘이 생각하는 것도 똑같을까? 서로를 위한 선물. 금액을 보니 3만 2천 엔이었다. 내가 넣은 것은 3만 엔이었는데, 민망했다. 금액이 적어서가 아니었다. 2천 엔에서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긁어 담았다는 의미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일본에서 남겨온 천 엔짜리 몇 장이 부끄러웠다. 역시 나보다 네가 한수 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