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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의 이유

승리보다 패배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by 마이즈 Feb 24. 2025

신도림 테크노마트. X층에는 남자들이 가득 차 있었다. 이곳에서 열리고 있던 행사는 스트리트 파이터 4 대회. 거의 십여 년 만에 참가하는 격투 게임 대회였다.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오는 한 남자는 심연 군. 후에 애니메이션풍 모바일 게임으로 유명한 디렉터가 되는 친한 게임 기획자 동생이었다. 우리 둘에게는 격투 게임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함께 연습을 했고 같이 대회에 참가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 동체 시력도 뭐도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격투 게이머라고! 이런 축제에 빠질 수는 없지!

스트리트 파이터 4 전국 대회가 열리던 해였다.

조 추첨 결과, 1회전 첫 시합에 출전하게 되었다. 내가 선택한 캐릭터는 춘리. 상대는 류. 게임이 시작되고 첫 라운드가 끝나고 나니 진행 요원이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예선은 5판 3승 제로 해야 하는데, 옵션 바꾸는 것을 깜빡했네요. 이번 판은 연습으로 진행하고 끝나고 나면 수정할게요. 그 말에 힘을 뺐다. 이 선수와 다시 5판 3승을 할 텐데 나의 전략을 보여줄 필요는 없지 않나? 일단 2 vs 0으로 내가 밀리는 상태로 게임이 끝났다. 진행 요원은 옵션에서 게임 룰을 5판 3승으로 교체했고 우리는 다시 시합을 시작했다. 일단, 내가 2판을 이겼다. 거꾸로 2 vs 0으로 내가 앞서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한 번만 더 이기면 되는 상황. 하지만 이미 게이지는 모두 소진된 상태였고 한 판을 버리며 게이지를 모아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상대가 한판 이기는 순간, 진행 요원은 게임 종료를 외쳤다. 에? 왜죠? 아직 남았잖아요? 아까 옵션 바꾸기 전에 이 분이 두 번 먼저 이겼으니까요. 에? 게이지 운용도 그렇고 격투 게임 한 시합은 여러 가지 생각할 것들이 있지 않나? 설명하려다가 포기했다. 이 진행 요원은 게임을 모르는구나. 그리고 보니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3판 2승제에 이어서 5판 3승제에 승점을 더하다니. 전대미문!

고등학교 시절에는 격투 게임 대회가 열린다고 하면 어디든 달려갔다. 좋아하는 마음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상금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물론 순위권에 들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나마 성과가 나온 것은 다섯 번 정도였는데, "월드 히어로즈 2" 용산 대회에서 네오지오를 받았던 것, “사무라이 쇼다운 4” 오락실 대회에서 리무루루로 2등을 2번 했던 것. “스트리트 파이터 제로 2” 대학교 축제 대회에서 1등을 했던 것. “킹 오브 파이터즈 97”의 지역 대회에서 1등을 했던 일이다. 당시는 내가 격투 게임을 잘한다고 생각했고 격투 게임을 잘하는 여자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킹 오브 파이터즈” 프로 게이머인 여성과 연인이 된 적이 있었다. 사귀는 도중 설레는 마음으로 대전을 했지만 무참히 깨졌다. 그녀는 나를 한 껏 무시하는 발언을 했고 그 이후 자존감에 상처를 입게 되며 격투 게임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그녀의 전 남친도 "킹 오브 파이터즈" 프로 게이머였으니. 내가 이기지 못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했을지도 모르겠다.

연인의 쿨라에게 무자비하게 패배하고 무시당하는 발언을 듣게된 이후 격투 게이머를 사귀겠다는 생각은 두번 다시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멀리 하던 격투 게임을 다시 시작한 것이 스트리트 파이터 4였다. 그날은 심연 군도 2회전인가 3회전에서 패배했고, 우리는 근처를 둘러보며 다음 주를 기약했다. 2주 연속으로 대회 일정이 있었다. 이건 정말 게임인으로써 그냥 넘어갈 수 없지 않나? 그날 돌아가는 길에는 "소울 칼리버 4" 대회에도 참가했다. 예선 탈락이었다. 하루에 두 번이나 대회에서 탈락해서인지 불길이 더 세차게 타오르는 느낌이었다. 집에 가자마자 XBOX를 켜고 밤늦게까지 연습에 매진했다.

스트리트 파이터 4는 꺼지던 격투 게임의 불꽃을 다시 살려주었다.

처음으로 입상한 격투 게임 대회는 “월드 히어로즈 2”였다. 당시 상품은 네오지오라는 비싼 게임기였는데, 갖고 싶기는 했지만 생활비 때문에 곧바로 중고로 팔아야 했다. 꽤 두둑한 돈을 한 번에 얻고 나서부터 눈에 보이는 대회는 전부 참가했다. 하지만 막상 입상한 대회가 별로 없는 것을 보면 그리 잘하지는 못했나 보다. 한 번은 3DO라는 게임기로 진행하는 “슈퍼 스트리트 파이터 2X” 대회가 열렸다. 친구 조 군과 함께 맹렬하게 연습했다. 일하던 게임 가게에서 퇴근할 때 중고 3DO를 빌려서 조 군 집에서 밤샘을 하기도 했다. 이 대회만큼은 자신 있었다. 왜냐? 일반 게이머들은 3DO 컨트롤러에 익숙하지 않을 테니까. 오락실 조작을 생각하고 오는 상대는 필살기 입력의 어려움에 당황할 것이다.

3DO판 슈퍼 스트리트 파이터X 대회에도 참가했다.

연습 끝에 조 군과 함께 대회에 참가했다. 나의 주력 캐릭터는 춘리. 1회전 상대는 켄이었다. 예상대로 상대의 조작 미스가 이어졌고, 손쉽게 승리했다. 2회전 상대도 켄. 마찬가지였다. 3회전 상대는 같은 춘리였다. 이 캐릭터는 커맨드 입력기가 없기 때문에 입력 미스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이제는 오로지 실력 대결이다! 그렇게 3회전까지 통과했다. 어쩌면 본선을 넘어 우승까지 갈지도 모른다는 자만감이 차올랐다. 조 군은 2회전에서 탈락한 상태였다. 시합을 끝내고 조 군이 대기하는 관중석을 향해 주먹을 치켜올리며 포즈를 취했다. 뭔가 될 것 같았다.

춘리 vs 춘리의 대결. 간신히 승리했다.

문제는 4회전이었다. 상대가 류를 골랐는데, 커맨드 미스 문제가 아니라 게임 자체를 너무 못하는 상대였다. 이런 실력으로 어떻게 4회전까지 올라왔나 싶었다. 덩치가 조금 큰 편이었는데, 상대를 위협하기라도 한 건가? 가볍게 1라운드를 이기고 2라운드를 시작했다. 나의 연속기가 들어가는 순간, 갑자기 게임이 멈췄다. 상대가 고의로 Pause 버튼을 누른 것이다. 덕분에 나의 조작이 입력되지 않았고 연속기가 끊겼다. 그리고 다시 정지를 풀었다. 반칙 아닌가? 옆에 서 있는 진행 요원을 부르기 위해 pause를 눌러 게임을 멈췄다.


“무슨 일이죠? 왜 게임이 멈춰 있는 거죠?”

“조금 전 이 사람이 게임을 멈춰서 흐름을 방해했어요.”

“얼마 나요?”

“한... 1초?”

“그건 실수로 눌린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지금 멈춰 두신 것은 명백한 시합 방해 행위입니다.”

대회 중에 pause 버튼을 눌러 방해한 그 플레이는 몇 번을 생각해도 황당하다.

아무리 연속기 이야기를 해도 통하지 않았다. 진행 요원은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답답함에 상대의 멱살을 잡았다가 제지당했고, 그렇게 반칙패를 당했다. 적어도 진행 요원이라면 이 게임을 좀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현피라도 뜰 생각으로 상대에게 끝나고 남으라고 말했다. 끝까지 기다렸지만 상대를 만날 수는 없었다. 다만, 결승전 플레이를 보며 잠시나마 우승을 생각한 내가 부끄러워졌다. 세상에는 강자가 정말 많구나. 설마 디제이로 우승하다니.

디제이로 우승을 할 줄이야. 진심으로 감탄할 만한 실력이었다.

대회 이후 조 군과 “스트리트 파이터 제로”에 올인했다. 지난 대회의 설욕을 씻기 위해서였다. 연속기 흐름이 막히는 것을 대비해서 연속기를 사용하지 않는 형태의 플레이도 연습했다. 3DO 대회에서 디제이를 사용하던 선수가 다시 출전한다면? 나는 그를 이길 수 있을까? 그렇게 오랜 기간 연습을 하고 “스트리트 파이터 제로” 대회에 출전했다. 지난번과 비교해서 더욱 크고 화려한 경기장이었다. 조 군은 이번에도 2회전에서 탈락했다. 나와 비등한 실력을 가진 녀석의 탈락은 나에게 충격과 사명감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나의 3회전 상대는 “버디”였다. 오락실에서 수없이 연습을 했던 게임이지만 이 캐릭터를 고르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당황한 채 시합이 시작되었고, 2 : 1로 패배했다. 상대는 모자를 쓴 남자였는데, 염색한 듯한 노란 머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그는 쓸데없는 말을 남겼다.


“너 고등학생이지? 학생이 공부에 마음을 빼앗기니까 지는 거야. 공부를 포기하거나 아예 대학생이 된 다음에 게임을 해라. 그럼 나처럼 강해질 거야!”


이 놈도 성인인 주제에 중2병이었다. 겨우 이긴 주제에 잘난 척은. 하지만 그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는 정말 강했을까? 둘 다 탈락했기에 돌아가도 상관없었지만 그의 플레이를 보고 싶었다. 나를 이긴 사람이 우승이라도 한다면, 왠지 나의 패배에 정당성이 부여되는 느낌이니까. 재수 없는 상대였음에도 응원했다. 하지만 그 역시 4회전에 패배했다. 약한 주제에 잘난 척은!

버디에게 패배. 대인 대전에서 단 한번도 싸워본 적이 없는 캐릭터였다.

일주일 뒤, 나는 심연 군을 다시 만났다. 둘이서 온라인 대전을 계속했기 때문일까? 심연 군이 묘하게 그의 주 캐릭터인 달심처럼 보였다. 이번 주 스트리트 파이터 4 대회는 지난주와 분위기가 달랐다. 남자만 잔뜩 있던 공간에 여성들이 많이 와 있었는데, 참가자인 경우도 있었고 코스프레 모델인 경우도 있었다. 일부는 대회에 참가하는 남자 친구를 응원하러 온 것 같았다. 격투 게임 대회는 항상 남자만 바글바글 했는데, 세상이 참 많이 변했구나.

심연군의 주 캐릭터는 달심이었다.

이번 대회에 등록한 나의 주 캐릭터는 춘리, 서브 캐릭터는 브랑카였다. 이번 시합은 무사히 진행되었을까? 그럴 리가. 첫 시합부터 문제가 있었다. 앞에 했던 플레이어가 키 배치를 본인에게 편하게 바꿔둔 것이다. 하지만 이의 제기를 하지는 않았다. 이번 진행 요원도 믿을 수 없었으니까. 모든 키의 위치를 기억하며 플레이하면 꼬일 수 있다는 생각에 강펀치, 강킥만으로 싸워서 승리했다. 서브 캐릭터를 브랑카로 정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2회전 상대는 류였다. 둘 다 한대만 남은 상황에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타이밍에 진공 파동권이 날아왔다. 가드를 해도 체력이 깎여 패배할 것 같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은 덕분에 역전의 기공포 한 방을 날릴 수 있었다. 그렇게 16강에 올랐다.

서브 캐릭터로 브랑카를 선택했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

8강부터는 방송 촬영을 진행한다고 했다. 한 번만 더 이기면 방송 진출이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16강 상대도 또 류였다. 하지만 기묘한 느낌이었다. 지난 십 수년간 싸워온 류와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점프를 하길래 공중에서라면 당연히 강킥이나 약킥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중 펀치를 사용했다. 백 점프로 거리를 벌리길래 파동권을 쏠 줄 알았는데, 원거리에서 용권 선풍각을 썼다. 이게 뭐지? 바보인가? 싶어서 다가갔는데, 의외로 바로 착지한다. 에? 그 거리에서 용권 선풍각을 쓰는데, 심지어 약 버튼이라고? 당황했다. 지난 일주일간 온라인 대전에서 만난 류는 최소 100명은 넘을 텐데,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플레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16강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 플레이어도 대단했지만, 나 자신의 실패였다. 반복되는 경험으로 류의 패턴은 이럴 거라는 고정관념을 가진 것이다. 비록 패배했지만 어쩐지 후련했다.


“저 류, 황당하네요.”

“아, 보고 있었구나. 난 여기까지네.”

“네. 저도 16강 탈락이에요. 시합마저 보고 가실 거예요?”

“아니, 어차피 방송한다고 하니까 나중에 찾아보지 뭐.”

패배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더 이상 변명할 필요는 없겠지.

더 이상 컨티뉴를 위한 패배의 변명을 찾을 필요는 없다. 이미 끝난 승부에 핑계를 댈 필요도 없다. 예상치 못한 환경도, 나보다 잘하는 사람의 존재도, 심지어 편법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돌이켜보면 그동안 참가한 모든 격투 게임 대회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것은 나의 경험에서 기인된 결과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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