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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드맥스 Jul 09. 2024

다른 생각, 다른 언어

나는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 해외여행이라면 꽤 다녀봤으니 어느 정도는 시야가 넓어졌을 거라 생각했고, 글로벌한 시대에 익숙한 세대니까 다른 나라에 살며 적응하는 건 그리 까다로울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평생 고향을 떠나 살아 경험이 없던 나에게 타지 생활은 모든 것이 그저 새로움의 연속이었다. 당연히 모두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몰라 일일이 물어봐야만 알 수 있는 상황이 바로 외국인으로서의 생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국에 살았을 땐 전혀 알 수 없던 부분이다.


한국에 살 땐 한국 포털사이트로 한국어로 쓰인 자료들만 검색했었다. 나의 디지털 리터러시 능력은 거의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영어를 모르고 당장 눈앞에 쉬운 답이 있으니 사실상 선택지가 없었다. 그나마 영어를 조금이라도 하게 되면서 느낀 가장 큰 변화는 검색의 영역이다. 영어로 쓰인 자료는 여러 가지 이유들로 그 양이 방대하다. 심지어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한국의 근현대사조차 미군정에 의해 영어로 쓰인 주요 자료가 더 많다고 한다.


한국말로만 쓰인 자료는 다른 언어로 쓰인 자료들에 비해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자료의 양에 대해 단순히 생각해 보자.

"한글 사용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국내 자료 VS 영어권 사용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 자료"

언어적인 이유만으로도 고국에 살 때 내가 갖고 있던 다른 나라들에 대한 정보는 굉장히 단편적이었던 것 같다.


다른 언어와 관련하여 표절에 대한 논란이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어디까지를 표절이라고 봐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도 고민해봐야 할 문제겠지만,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쓰는 글에 대한 논쟁이 많다. 이미 어떤 전문가가 해석하여 써놓은 글들을 마치 자기의 생각처럼 각주 없이 번역하여 쓰는 문제가 심각하다고 한다. 논문이나 책을 쓸 때의 인용구, 자료 출처에 대한 논의는 점점 더 세심하게 인식되고 있다.


나는 언어가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한국을 떠나 살고 있다. 그는 영국 사람이다.

그가 한국지사에서 일할 때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했다. 한국에 살 때 그는 한국어를 잘 못해도 큰 어려움 없이 살았던 것 같다. 사람들은 그가 편의점에서 한국말로 물건을 살 때도 영어로 대답하고, 레스토랑에 가서 음식을 한국말로 주문해도 영어로 답했다. 물론 그의 한국어가 서툴고 이태원에 살아 더 그랬을 수도 있다. 한국 사람들은 유독 차별적으로 영어엔 친절(?) 한 것 같다. 그는 끝까지 한국말로 하고 가게 직원은 끝까지 영어로 말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나는 특별히 더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한국말을 못 하는 외국인과는 사귀고 싶지 않았다. 그때부터 한국에 살면서도 언어의 불편함을 모르던 그가 빛의 속도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몇 개월 만에 한국어능력 5급이 되어 결혼까지 했다. 우리는 주야장천 한국말로만 대화했다. 그때는 너무 편하고 좋았지만 나중에는 그게 그렇게 큰 장벽으로 돌아올 줄 몰랐다. 우리는 그의 본사 업무 때문에 영국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상황이 바뀌었다. 책, 영화, TV 프로그램, 여행 등에서의 외국 경험은 정말 아주 작은 일부 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어와 생각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며 살기 때문에 이런 표현만 있는 것인지, 그런 표현만 있어 그런 생각만 하게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둘은 기가 막히게 서로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작게는 같은 영어를 사용하더라도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미국 등의 영어는 단순히 발음만 다른 게 아니고 표현 방식도 차이가 있다. 당장 한국만 해도 지역마다 표현방식과 단어 자체다른 걸 생각해 보면 광범위한 지역의 영어가 어떨지는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는 일이다.

- 같은 상황을 두고 지방마다 다르게 반응하는 상황을 연출한 우리나라의 코미디 프로그램이 생각난다.


한쪽 나라에만 있는 표현도 꽤 많다.

'이럴 때 쓰는 한국말 이거 있잖아. 영어로는 뭐라고 해?'

'그런 말 없는데? ㅋㅋ 여기서는 그런 생각 안 하는 것 같아. 그런 단어가 없어.'

당연히 영어로 있는 단어가 한국어에 없는 경우도 역시 많다.

그러므로 직역만 해서는 속내를 표현하기가 어렵고, 어떻게든 내가 겪은 상황을 예를 들어 설명해도 이해시키기가 어렵다.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한다니까 ㅎㅎ그래서 언어는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한 것 같다. 언어를 문법이나 구조로만 이해하고 모국어로 떠올린 말을 번역하려 들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생각부터 그 언어방식으로 해서 말을 해야 한다고 한다. 어렵다.

- 이래서 익숙해지기 위한 꾸준한 반복이 중요하고, 현지에서 현지사람들과 현지 언어로만 생활하는 게 효과 적이었던 거구나.


영어 사용자인 내 동거인은 한국말을 할 때도 주어가 아주 중요하다. 주어가 없으면 굉장히 헷갈려한다. 이것도 언어의 특성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는 행동이 주요한 언어인 것 같다. 한국어에는 주어가 생략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는 나와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눈치게임하듯 초 집중상태가 된다. 어느 날 내가 평소 버릇대로 주어 없이 줄줄 길게 얘기를 했는데도 그가 찰떡 같이 알아들어버렸다. 웬일이냐고, 이제 한국사람처럼 생각하게 된 거냐는 나의 물음에 그가 거만한 표정으로 답했다.

- 독서실 강아지도 3년 지나면 책을 읽을 수 있어.

ㅎㅎ 알듯 말 듯 어디서 들어본 듯한 말인 것 같긴 한데 뭔가 이상하다. 어땠든 그는 이제 풍월을 읊는 서당개가 되어 조금은 한국식으로도 사고를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나는 계속 영어공부를 하고 있다. 워낙 공부를 싫어해 열심히는 못한다. 영국에 살고 영국가족이 있지만 집에서는 한국말만 주구장창하며 영어공부를 하고 있다.

- 동거인이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잉글리시면 뭐 하냐고. 한국말을 귀신같이 해서 영어 하는 게 어색한걸.

이제 와서 영어로 소통하기엔 한국어로 굳어진 편안함을 이겨낼 도리가 없다. 눈앞의 안락함을 위해 그에게 한국어 공부를 압박했던 과거의 나를 혼내주고 싶다. 그리고 작심 5분 만에 끝나고 마는 영어 Day를 하는 지금의 나도 맴매해주고 싶다.


이래서는 아무리 가까워도, 아무리 편해도 그는 나의 영어선생님이 될 수 없겠다. 정교한 말로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없는 나는 이곳에서 어린이 신분이다. 나는 어린이 신분을 벗어나고자 일주일에 한 번, 영어레슨을 따로 받고 불타는 의지로 영어 레시피도 만들어 보고 있다. 다른 언어를 배우며, 다른 언어를 하는 사람들과 생각을 얘기하고 다른 방식을 배우는 중이다. 좁디좁은 나의 시야가 아주 아주 아주 조금은 넓어지는 중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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