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막 너와의 새로운 인연(完)
불의 나비 31화
“오빠…….”
해 조각상으로 향하던 길. 한참을 걷는 중에 내 눈치만 계속해서 슬쩍 볼뿐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인화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우물쭈물하는 인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그게…… 아까는 갑자기 너무 화가 나서…….”
“잘했어.”
아래로 추락해 있던 인화의 시선이 괄목을 싣고 단번에 나를 향하였다.
“화난 거…… 아니었어?”
“화났지. 그 남자한테.”
인화가 안 그랬으면 내가 손을 썼겠지. 그러면 일이 더 커졌을 테고.
“네가 잘못한 거 없어. 되레 잘한 거지.”
다시금 울상이 된 인화의 얼굴에 어떻게 하면 미소를 수놓아줄 수 있을까.
“그래도 미안해. 좀 더 참아볼걸…….”
“아니. 참지 마.”
그런 말을 듣고도 네가 뭐 하러 참고 있어.
“참는 건 나 혼자면 충분해.”
수많은 감사와 권위, 칭송이 오가는 곳, 그리고 동시에 따가운 시선과 훼방, 힐난이 머무는 곳, 그곳이 특경부였다.
특경부를 사를 완전히 배제하고 오로지 아버지의 이득을 추구하는 기관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나 많았다. 그 기관이 자신들의 목숨을 사시사철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부지하는 까막눈일 뿐이지. 그래서 특경부 광견이니 뭐니라는 근거를 알 수도 없는 이야기들도 떠돌아다니고.
나에 대해서 멋대로 떠드는 건 전혀 상관없다. 그런 사소한 걸 신경 쓸 여유조차 없다. 굳이 다른 대원들이 나서서 막아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괜히 쓸데없는 곳에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냥 무시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누구도 안 그래 주지만.
다른 대원들에 대한 허무맹랑한 풍문이 바람결에 들려도 나는 참아야 한다. 특경부의 리더, 이 대표님과 김 원장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에 예오를 묻힐 수는 없으니.
하지만, 특경부 내에 다른 대원들이 발끈하여 저지른 일에 책임은 지고 일을 쉽게 해결해 줄 수는 있다.
얼마든지.
“누누이 말하잖아. 모든 일은 내가 책임져. 그러니까 참지 말고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행동 다 하고 다니라고.”
내 사람들에 대해 함부로 지껄이고 있는데 당사자를 위해 직접적으로 나서줄 수는 없으니 이 정도는 해줘야지.
그제야 드디어 인화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었다.
“든든한걸?”
진짜, 어떻게 이렇게 예쁘지.
“그럼 오빠도 참지 마.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행동 다 해. 내가 책임져줄 테니까.”
가슴이 아리다. 왜일까. 이유는 잘 모르겠다.
“든든하네.”
네가 너무도 예쁘다.
“저녁은 먹었어?”
“응. 본부팀끼리 사회 나가서 사 먹었어.”
“뭐 먹었는데?”
“초밥. 쌍둥이가 먹고 싶다고 해서. 오빠는? 저녁 먹었어?”
나는 손에 들려 있는 종이가방을 들어 인화에게 보여주자 인화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뭐야, 아직 안 먹었어?”
“딱히 먹을만한 시간이 없었어서. 귀찮아서 안 먹으려고 했는데 원우 형이 사줘 가지고…….”
순간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나는 급히 말을 멈추고 옆을 바라보았다. 나를 꾸짖으려는 듯한 인화의 눈빛에 아차 싶었다.
이런, 얼마나 혼날지 감도 잡히지 않는군. 인화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잔뜩 찌푸렸던 미간은 어느새 멀끔히 펴져 있었고 옅은 암갈색의 고운 두 눈동자에는 사무친 걱정만이 깃들어 있었다.
“뭐가 또 그렇게 걱정이야. 뭐 별일이라고.”
“다른 사람이었으면 걱정 안 했어. 근데 오빠잖아. 밥도 좀 잘 먹고 잠도 푹 자. 응?”
오로지 나를 위한 걱정. 나만을 향하는 눈빛. 다른 사람이 아닌 네가 해주어서 이리도 특별히 느껴지는 걸까.
“알았어.”
어느덧 도착한 해 조각상 앞에서 팔찌를 빼며 나는 말을 덧붙였다.
“가자. 집에 데려다줄게.”
“본부 가봐야 되는 거 아니야? 나 혼자 가도 괜찮은데. 아니면 나도 남아서 일 좀 도와줄까?”
“됐어. 시간이 몇 시인데 어서 집에 들어가 봐야지. 이모랑 삼촌이 걱정하시겠다.”
불 속성이 주입된 해 조각상이 주황빛을 따스히 표출하였다.
여름이 찾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알리는 옅은 더위가 밤 중에도 여전히 바람을 통해 느껴지고 있었다. 조금씩 길어지는 해는 이미 저문 지 오래. 노란빛 가로등이 길을 비추고 매미가 귀를 찌르며 울었다.
“아직 오월인데 벌써 슬슬 더워지네.”
“그러게.”
여름의 내음이 봄이 품은 풀잎 곳곳에 살며시 스며들기 시작하는 오월이었다.
“그나저나 왜 이때까지 퇴근도 안 하고 있었어?”
“아니, 뭐 그냥…….”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인화가 내 눈을 피했다. 그 속에 숨겨진 이유가 의연히 지극한 존재감을 내뿜어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다.
“내 생각 그만해.”
“누, 누가 오빠 생각했대?”
“얼굴에 훤히 씌여져 있구만.”
계속해서 나를 걱정하는 인화가 어찌도 사랑스러워 보이던지. 아, 괜히 멋대로 오해하면 안 되는데.
시시껄렁한 이야기들 속에서 걸어 다니다 보니 어느새 인화의 집 바로 앞까지 도착해버렸다. 그것도 너무 빨리. 왜 너랑 있다 보면 유독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만 더 천천히 걸어올걸.
“다 왔네.”
어째선지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내보이며 인화가 자신의 집 쪽을 응시하였다. 다시금 내게 시선을 옮긴 인화의 입가에는 여느 때와 같이 온 세상의 빛을 머금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응. 조심히 들어가.”
그래, 몇 시간만 참으면 또 보니까. 본부에서 철야하면서 정신없이 업무 보다 보면 금방 다시 보겠지.
“그리고, 미안해. 사실 아까 전에도 협회 오기 전에 본부에서 자잘한 업무 보다가 왔거든. 오빠 일 엄청 많으니까 조금이라도 도와주려고……. 근데 또 협회 와서는 괜히 짐만 됐네.”
이렇게까지 늦은 시간에 업무를 계속 봤다고? 나를 위해서?
……미치겠다, 정말.
나는 행동 하나하나가 내 심장에 얼마나 무리가 가는지도 모른 채 시무룩한 표정을 짓던 인화에게 말했다.
“정 미안하면 소원 하나 들어줘.”
미안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전혀 먹힐 것 같지 않았다.
당연히 나는 소원 같은 거 받을 자격 없다. 인화가 들어줘야 하는 입장도 아니고. 인화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전할 게 아니라 내가 인화에게 좋아, 아니 고맙다고 말해야 될 판인데.
“뭐든!”
근데 인화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고개를 크게 한번 끄덕였다. 나는 슬며시 웃었다.
그래도 기회를 잡은 이상,
“너 이제 다른 남자랑 이야기하지 마.”
사심을 채울 수 있는 만큼 채워야지.
“다른…… 남자?”
“어. 다른 남자한테는 상냥하게 말해주지 마. 웃어주지도 말고, 눈길도 주지 마.”
“어…… 왜?”
도저히 내 소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인화가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이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멋대로 튀어나온 말은 기어이 인화에게 단숨에 닿았다. 뭐, 의지가 아니라 한들 본심이 아닌 건 아니지.
“질투 난다고.”
알기나 해?
예쁜 걸 보고 있을 때, 맛있는 걸 먹을 때, 심지어 내 꿈속에도 네가 찾아오고 아침에 일어나면 네 생각부터 난다는 걸. 머릿속에는 온통 너로 가득 차고, 너의 웃는 모습이 계속 생각나는걸. 내 눈은 어느샌가 무의식적으로 너를 찾고 있고, 네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서 미친 사람처럼 실실 웃고 다녀. 하루 중에 너를 생각하지 않는 시간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야. 진짜 미치겠다니까.
“좋아해, 인화야.”
사랑이란 감정이 너로 정의되었다.
인화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 다시 본부로 돌아왔다. 남은 업무를 보려고 책상에 앉았을 때 이미 시계는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갖가지의 서류가 종류별로 잘 정돈되어 업무를 처리하게 편리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이 늦은 새벽에 이런 걸 했을 사람은 단 한 명뿐이지.
아 진짜, 우리 여자친구님 너무 사랑스러워서 어쩌지.
심장을 진정시키려 밖에서 잠시 걷다 들어왔지만, 심장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고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래서 일에 집중이 될지 의문이었다.
나는 핸드폰을 들어 진우에게 문자를 남겼다.
‘일이 좀 많이 남아서 오늘 집에 못 들어갈 것 같다.’
문자를 전송하고 남은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처리해야 될 게 많군. 가장 빨리 해결할 수 있는 업무가…….
“아, 맞다. 주먹밥.”
잊을 뻔했던 주먹밥을 꺼내 포장을 벗긴 다음 한 입 베어 물었다. 천천히 주먹밥을 씹으며 문득 눈에 들어온 책상 위 서류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서류의 가장 첨단에 ‘특수 속성 경호 본부 하계 훈련 계획서’라고 적혀 있었다.
“……여태 잘해왔으니까.”
단 한 번도 훈련 계획서에 관해서 기각당했던 적이 없었다. 훈련 내용은 훈련 직후에 확인해 봐도 상관없겠지. 나는 펜 하나를 들어 특경부 대표 결재란에 사인을 했다. 하나는 끝났고, 이제는 내가 없을 때 나왔던 불법 속성 사용자들을 확인할 차례.
아무도 없는 적막한 본부 안, 심장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렇게 너와의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