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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엘 Aug 14. 2024

오늘 내가 장애인이 된다면..

초기 중도장애인 복지 가이드, 1편 심리적 장애수용

장애는 예고하고 찾아오지 않는다. 그냥 갑자기,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장애를 입게 된다. 필자 또한, 그랬다. 여기에 쓴 복지 가이드는 그저 그 방향성을 제시할 뿐이다. 선택은 장애인 당사자의 몫이고, 절대로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이야기하고 싶다. 정보라는 것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정보가 되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되려 아는 것이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하나의 일을 풀고 싶다. 이 이야기가 극단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이 글이 어떤 것을 시사하는지 생각해 보길 바란다.

병원에서 함께 4개월 정도를 동고동락한 병원 동기가 있다. 최근 그 병원 동기로부터 이상한 전화를 받게 되었다. 바로, 조력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고, 의뢰 단계에 있다고 했다. 동기에게 왜 그랬는지 물으니 답은 심플했다. 병원에서 함께했던 친구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처음에는 같이 즐거워해주고, 같이 축하하는 마음으로 응원했지만, 점점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자신을 볼 때마다, 상대적 박탈감이 생겼다고 한다. 그렇게 되니, 점점 오는 전화도 피하게 되고, 점점 고립되어 가는 자신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연락이 꽤 오래 끊겼다가, 불현듯 걸려온 전화 그것은 바로 이제 죽으러 가니 잘 있다가 보자는 전화였다. 그 전화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이 글을 몇 개월 간 썼다 지우며..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삶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심도 있는 고민을 거쳐야 했다. 필자의 고민의 결과와 정의를 말하기 전, 한국사회에서 장애를 입는다는 것은, 실패자 & 낙오자 & 사회적 약자 등의 프레임이 생긴다. 내가 원치 않아도, 휠체어를 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로 귀결된다. 그 도움은 경제적, 심리적, 이동권 등등 다양하다. 누군가 좋은 마음이라는 생각으로 우리에게 다가서서 하는 행동들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앞으로 시리즈로 연재할 글들은 장애인들에 복지와 권리에 대한 이야기 일 것이다. 그전에 어떤 마음으로 주변에 있는 중도장애인을 대하고 있는지 살펴보기 바란다.


*아래는 필자의 스토이니, 불편하신 분은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필자는 현재 시신경척수염(데빅병)을 앓고 있다. 첫 발병은 눈으로 왔으며 2018년도 09월쯤이다. 그때 아주 운이 좋아, 빠르게 세브란스로 전원 되었고 발견하게 되었다. 이후, 딱 1년마다 별일 없이 지내다 의사 선생님을 만나기로 했었다. 그런데 딱 1년 후, 전신마비로 실려가게 되었다. 당시는 T12~C2까지 병변이 발생했으며, 응급실을 통해 집중치료실에 입원 후 고용량스테로이드 치료를 병행했으나, 입원 기간 동안 2번의 재발이 일어났다. 현재 필자의 레벨은 T6, AsiaA 완전마비 상태이다. 그리고 전신마비 상태로 재활의학과에 트랜스퍼되어 재활치료를 시작했다. 약 2주를 생각했던 병원에서의 시간은 1년이 되어 버렸다. 이후 국립재활원으로 이동하여 남은 재활치료를 이어갔다. 발병 3개월 전에 가면 6개월을 있을 수 있어서 필자는 약 6개월 조금 넘게 재활치료를 받았다. 재활은 쉽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고 마비된 다리의 무게는 실로 어마 어마했고, 팔로 몸의 무게를 지탱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리고, 배뇨와 배변 또한 필자에겐 두려움이었고, 샤워와 목욕이라는 뻔한 일 또한 매우 치열하게 사투벌여야만 했다. 그 모든 일들은 뒤에서 풀어낼 테니, 궁금하셔도 조금만 기다려주길 바란다. 이후,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사회에 나와 맞닥뜨린 문제는 실로 다양했다. 모든 가게와 카페 상점엔 조금이라도 턱이 존재했고, 사람들은 매우 나를 불쌍하게 바라보았으며, 더 나아가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 편한 사람이 참 많았다.  그리고 1년, 2년이 지나 5년이라는 짧고도 긴 시간이 지나갔다. 그 기간 동안 실로 다양한 발버둥을 치며 살아왔음은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안다. 그렇게 발버둥을 쳐야 사회생활이 가능한 사회라는 것이 마음이 아팠고, 병원동기들과 점차 벌어져가는 격차도 마음이 아파왔다.




Q. 장애인이 재활을 거쳐 사회에 나온다면?


장애인이 사회에 나오면, 가장 많이 부딪히는 문제는 이렇다.

1. 물질적 자립

2. 주거 자립

3. 장애인 이동권

4. 주변의 시선

5. 일상생활(배뇨, 배변, 식이, 등) 관리

6. 신경통과 같은 돌발성 통증 관리

7. PTSD, 공황장애와 같은 심리적 문제 등


앞으로 몇 주간 이러한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 나아가야 하는지 제시할 것이다. 물론 필자가 제시한 방법이 반드시 맞다고 할 수 없으니, 참고하고 더 좋은 의견이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길 바란다.




Q. 현실적 장애수용의 한계는?

그중, 0번째는 장애인이 돼서 사회에 나올 때 겪는 문제이다. 바로 “장애 수용”이다. 처음 질병 혹은 사고로 휠체어를 타게 되면 반응은, 한 마디로 ”청천벽력“이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혹은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등의 반응이다. 필자의 경험을 나누고 싶다. 필자는 장애를 입은 후 총 3번의 장애수용 관련 상담을 받았다. 그중 첫 번째 상담 때이다.

첫 상담은 *일상홈이라는 프로그램에 들어갔을 때이다. 첫 상담은 총 10회기 정도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선생님은 나에게 이와 같은 말씀을 해주셨다, “OO 씨는 회복탄력성이 참 좋은 것 같아요 “라고 말이다. 그 회복 탄력성의 원천에 대해서는 다음에 글로 한번 더 풀어내려고 한다. 그리고 ”늘 도전을 받는다 “라고 말씀을 해주셨다. 필자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거기엔 장애를 수용하는 나의 태도가 변화된 것을 알 수 있었다. 필자는 여전히 장애가 일어났던 그 날짜를 기억한다. 2019년 09월 22일 몸에 갇힌다는 말이 처음으로 실감되었다.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는 그야말로 총성 없는 전쟁터였다. 밖에서 보기엔 그저 누워있는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필자의 마음에선 두려움과 불안함을 넘어, 죽음의 생각이 실시간으로 오고 갔으니 말이다. 그렇게 필자가 처음 재활의학과를 통해 재활을 받던 날 의사 선생님은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걸을 수 있을지, 언제일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이 말을 들은 나의 머릿속엔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 겹쳐 보였다. 어릴 적부터 활발했던 나에겐 마치 사형선고와도 같은 말이었다. 그저, 하염없이 누워 창밖을 바라보는데, 비가 왔던 걸로 기억한다. 마치 나의 마음을 대변하듯 창너머 소나기는 더 강하게 내렸다. 한 치 앞에 있는 창문 발치 앞도 갈 수 없었고, 정말 비참하게도 죽을 수도 없었다. 그게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죽음마저도 선택할 수 없는 삶!

정말 비참했다. 너무 비참해서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그때 마음의 결심을 했다. 열심히 재활을 해서, 죽음을 선택하자!라고 말이다. 처음부터 살고자 선택한 재활은 아니었다. 스스로 존엄하게 죽기 위해 난 재활을 열심히 했다. 움직이지 않는 손을 열심히 움직였고, 휠체어를 밀고 다니고, 스스로 이동을 하게 되었을 때쯤, 나의 마음은 어떠한 고비를 지나, 큰 터닝포인트를 맞게 되었다. 그 덕분에, 자살이라는 단어가, 살자!로 바뀌었다. 그때 상황이 좋아졌느냐?  그렇지 않았다. 그저, 나의 마음이 바뀌었던 것뿐이다. 그리고 지금 그 생각의 차이는 현저한 차이를 만들어냈다. 다시 일을 하고, 대학원을 다니고, 차를 운전하며, 아주 대범하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차이.

그 조금의 생각의 변화가 훗날 엄청난 변화를 가지고 왔다. 0번째인 장애 수용이 일어났던 것이다. 단순히 희망적인 말이 아니라, 실체적인 장애 수용! 그 장애 수용의 결론은 나 스스로 이뤄낸 것이 아니다. 내 주변의 많은 지인과 또 나를 존재 자체로 봐주던 사람들을 통해 일어난 것이다.


휠체어를 탄다고 해서, 내 삶이 무너진 것은 아니다!
휠체어가 내 삶에 그려 넣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다시 이전처럼 “이라는 말을 버리자!
그리고.. 언어를 바꿔보자!
휠체어 위에 나를 있는 그대로 보자!
다르게 살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구나!

너는 휠체어 탄지 오래되었으니 하는 말 아니냐 할 수 있다! 아니다. 필자는 휠체어 탄지 5년 정도 되었다. 휠체어를 타고 사는 삶에 대해 불만이 있을 수 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그 탓을 하며 수많은 시간을 보낼 수 없다. 그렇다고 빨리 일어나라는 것도 아니다. “다시 살면 된다” 그저, 이 휠체어 위의 삶을 이번 생은 망했구나!라는 말이 아니라, 다르게 살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구나!라고 생각하는 힘이 길러지길 바랄 뿐이다. 필자도 그 과정이 얼마나 비참하고 힘든지 잘 안다. 필자 또한 겪어보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의 경험으로 모든 경험을 다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스스로를 갉아먹지 않기를 나는 바랄 뿐이다. 장애는 극복해야 하는 문제도 아니며, 장애를 가진 나 또한 쓸모없는 존재가 된 것이 아님을 기억하자! 그저, 휠체어를 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만 있을 뿐이다.




Q. 장애수용의 정의와 종류는?

현재 장애수용의 정확한 개념은 “장애로 인해 자신이 가치절하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의 장애를 단지 불편함이나 제한을 주는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장애수용이 일어나면 스스로 더 나아지려고 노력은 하지만 장애를 감추지 않으며, 장애로 인한 긴장감 혹은 수치심을 전혀 느끼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그렇기에 사회생활을 하는 장애인들에게 장애수용은 반드시 따라오는 문제이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반응으로 나뉜다.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의 장애 수용은 이미 논할 수도 없다. 장애를 부정하고, 없애버리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는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장애를 가진다는 것에 대한 화남, 분노 그리고 열심히 살다 날벼락 맞은 정말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이니 말이다. 여기서 장애를 처음 만난 사람들의 반응은 세 가지에서 왔다 갔다 한다. 분노-> 우울-> 좌절 이 세 가지의 감정이다. 이곳을 매우 요동치며 재활 병원에서의 시간을 보낸다. 오늘 재활을 잘해서 칭찬을 받았더라도 밤이 되고 새벽이 되면 마음은 얼룩진다. 그리고 최후의 보루로 적응, 포기, 거부 세 가지의 반응을 집어든다. 그에 따라, 병실에서의 생활 또한 확 변화된다. 매우 역동적인 곳이 바로 재활병동이다. 다들 휠체어에 앉아 있지만, 마음이 어떤 깃발을 잡느냐에 따라 반응이 매우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적응을 뽑아 들면, 살기 위한 혈투와 운동 즉 재활이 시작된다. 포기를 꺼내 집어든 사람은, 욕창이 생기든 말든, 누워서 일어나지 않고 무기력증에 빠진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온몸으로 필사적으로 장애를 거부하는 사람의 반응은, ‘다시 이전처럼 돌아가자!‘라는 구호 아래 걷는 행위를 되돌리기 위한 재활이 시작된다. 거기엔 분노가 늘 함께 한다.
이후, 사회에 나와서 만난 장애인들은 대부분, 체념적 장애수용을 보였다. 억압과 배제와 차별을 손수 다 느끼며,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장애를 수용한 것이다. 인간은 *향상성과 *가소성(유연성)의 원리를 가장 잘 적응이라는 이름으로 이용하는 동물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늘 자신의 기준을 두고 그것을 유지하거나 혹은 그럴 상황이 되지 않을 때는 가소성을 통해 해석을 바꾸어 나가는 방식이다. 이것은 나쁘고 좋고의 문제가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인간에게 필수불가결한 일이기 때문이다. 매일을 매우 좋은 상태의 컨디션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더라도 오늘 하루를 살아낸다! 자신의 각자의 방식으로! 아마 누군가는

“오늘만 버티자!‘라고 나에게 암시를 할 수도 있고,
”오늘 좀 피곤하니! 일을 조절하자!”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은 우리가 향상성을 유지하고 가소성을 통해 유연하게 나의 몸상태 혹은 정신 상태에 맞게 일을 조절해 나아가는 가소성(유연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인간은 이렇게 매일이 최고는 아니어도, 최저점에 상태에서도 최고점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존재이다.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체념적 장애 수용의 결과는 어떨까? 긍정적 장애 수용처럼 언뜻 보이지만, 그들의 말에는 원망과 늘 라떼는~이라는 말이 붙어 나온다. 흔히 말하는 내가 예전에 이런 사람이었어~와 같은 말이다.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냐고 할지 모르지만,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난 알았다. ”이전에 나는 이런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이라는 말의 행간을 읽어낼 수 있다. 즉,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이런 장애 수용의 결과는 “모든 것이 자기 안에 갇혀 있는 형태“가 보인다. 이러한 장애수용의 형태는 아주 오래전 장애를 겪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기성세대에서 많이 보여주고 있는 장애 수용의 형태이다.


Q. 그렇다면, 긍정적 장애수용이란?

일반인이 장애를 갖게 되면, 다음과 같은 단계를 겪게 된다.

- 초기의 충격과 분노 : 자기 가족과 다 둠이 잦고, 자책과 침습적인 반추로 인한 분노가 자주 올라옴

- 부인과 혼란 : 장애인으로서의 정체감을 거부감을 보임

- 현실 인식에 따른 상실 : 무기력함에 좌절하고 타인들에게 서운함을 자주 폭발적으로 표현함

- 고통과 절망 : 불면증이 심해지고 신체화 증상 및 자살사고를 하게 됨

- 우울과 방어적 은둔 : *자기 초점화 주의가 높아지고, 타인과의 교류를 끊고 칩거하며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반문함

- 도전과 깨달음 : 도전을 통해 통제감 및 성취감을 경험함, 자기 개념의 대한 정립 및 이타성이 발휘됨

- 수용과 성장 : 낙인과 차별에 의연해지고, 역셩 후 성장의 특성을 보임


*자기 초점화 : 주의가 자신의 내부, 즉 생각, 느낌, 행동 등에 초점이 맞춰진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 긍정적 장애수용은 위에서 보이는 양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절망을 하고 힘들어하기도 하는 등 같은 양상으로 보이지만, 결국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과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그 마음가짐이 일어날 때 장애인 마음 재활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몸이 아무리 건강하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건강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이 나를 휘감을 때, 난 병원에서 운동을 미친 듯이 했던 기억이 있다. 잡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말이다. 스스로 그런 생각이 들 때 대적할 수 있는 카드들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생각들이 날 휘감아올 때 말이다. 장애를 입은 초기에 있는 분들은 당장은 눈앞에 절망만이 와닿겠지만, 그렇지 않다. 조금만 다르게 생각한다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전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필자 또한 자살이 살자! 가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지금 당신도 충분히 할 수 있고, 해낼 수 있는 사람임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장애를 입은 사람들이 이 글을 통해
밖으로 사회로 나올 용기를 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재활을 앞두거나, 재활을 진행하는 시기에 이 글을 본다면,
꼭! 다르게 생각하는 마음 가짐을 시작해 보길 바란다!
그 한 끝의 차이가, 생각하지도 못한 차이로
여러분 눈앞에도 반드시 나타나게 될 테니 말이다.



<참고 문헌> 

중도장애인의 장애수용과 삶의 만족도 간의 관계예서의 우울의 매개효과, 이미경 박로사, 인문사회 21, 제13권 2호, p2315-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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