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를 털어보아요.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장을 본다. 새롭게 장을 볼 때까지 냉장고 안에서 선택받지 못한 야채들이 있으면 왜 그렇게 속상한지 모르겠다. 나중에 먹을 야채는 냉동보관을 해놨다가 먹으면 오히려 냉장보관보다 영양소 보존율이 높다고는 들었다. 그렇지만 내 당장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마당에, 이 야채를 내가 언제 먹을지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냉장고 털기를 한다. 사실, 대단한 것은 아니다. 냉장고에 남은 야채들을 다 함께 볶는 것이다. 콘셉트는 참 쉽고, 간단하다. 맞다. 누구나 칼질과 볶기만 잘할 수 있으면 된다. 색감을 보는 안목까지 탁월하다면 아마도 더욱 훌륭한 결과물을 가져올 것이다.
처음에 냉장고 털기를 했던 것은 외출을 앞둔 어느 오후였다. 영화를 예매해 놨는데, 하필 딱 저녁 먹는 시간대였다. 영화를 다 보고 먹자니 영화관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것 같았고, 한 끼를 제대로 먹고 가자니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그냥 집에 있는 야채 몇 종류를 댕강댕강 썰어서 볶아서 먹었다. 당시 버섯과 애호박, 그리고 파프리카를 볶았다. 그렇게 한데 모아놓으니 생각보다 그럴싸했다. 집에 남이 있는 빵까지 썰어서 함께 그릇에 올려두니, 하나의 요리 같았다.
그 후로 나는 주기적으로 냉장고에 남아있는 야채들의 상태를 살핀다. 곧 있으면 변해버릴 것만 같은 속상해 하기 직전의 야채들을 한데 모아놓고, 또각또각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낸다. 그러면 벌써부터 입에 침이 고인다. 익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는 감자나 브로콜리를 먼저 볶기 시작하여 종류별로 하나씩 투척한다. 야채가 많을수록 조리 시간은 조금씩 늘어간다. 하지만 그만큼의 정성 또한 늘어난다.
빵도 필수가 되었다. 올리브 오일에 야채를 볶는데, 간간히 배어 나오는 그 오일에 빵을 찍어 먹으니 완벽했던 것이다. 야채 볶음만으로는 살짝 허기질 수 있는데 빵으로 그 모자람을 채워주는 것이다. 그렇게 먹다 보면 또 와인 생각도 난다. 야채 볶음이라는 그 부담스럽지 않은 이미지 때문일까, 레드와인보단 화이트 와인 혹은 달지 않은 로제 와인을 소환한다.
냉장고에서 미리 칠링 된 와인을 한 모금 마신 후, 포크로 잘게 볶아진 감자 한 조각, 버섯 한 조각, 마늘 한 조각 먹는 것이다. 고기로만 기분 낼 줄 알았지, 야채만으로 기분을 내니 색다른 우아함이 묻어났다.
야채만 볶기 아쉬워서 계란 프라이를 해서 장식을 하기도 한다. 접시의 가운데에 계란 프라이를 올리고 그 주변을 동그랗게 야채로 마무리하는 것. 사실 별 거 아니지만 그렇게 한데 모아놓고 나면 참 예쁘다. 계란 노른자와 흰자 그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여든 야채들을 보고 있으면 눈도 즐겁다. 소박한 다정함이 모여드는 접시가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요즘은 닭가슴살을 구워서 곁들이기도 한다. 그러면 괜스레 정말 건강을 톡톡히 챙기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마냥 뿌듯하다. 계란 프라이 이후로 비주얼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해서 닭고기를 담는 모양도 허투루 하지 않는다. 그릇 위에 예쁘게 담아낸 모습에 기분까지 좋아진다.
냉장고 털이 야채 볶음은 접시에 담을 때, 먹을 때 그리고 접시를 비울 때 삼단 콤보로 만족스럽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비워진 냉장고를 확인할 때야 말로 냉장고 털이의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이다. 야채 본연의 맛과 버려지지 않을 권리를 존중하는 야채 볶음을 나는 계속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