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무침
여름에 태어나서 그런가, 여름 제철 음식들을 참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오이. 다른 계절엔 생각도 잘 안 나면서 여름이 되면 오이가 그렇게 당긴다. 막 몸속에서 오이를 먹으라고 재촉하는 것 같다. 어릴 적, 여름이면 엄마가 오이를 가지고 워낙 이것저것 만들어준 것도 한몫한다.
오이소박이, 노각 무침, 오이지, 오이지무침, 그리고 무친 오이들을 밥에 넣고 계란 프라이랑 들기름 둘러서 쓱쓱 비벼 먹기. 여름이면 그만한 게 없는데 말이다.
스위스의 올해 여름은 참으로 덥다. 전에 없던 폭염이라고들 한다. 서머타임이다 보니 낮이 너무 길다 보니 점심을 먹고 나서 오후 내내, 밤 9시 10시까지 너무 힘들다. 유럽 대부분 국가처럼 에어컨도 없이 산다. 사람을 축축 쳐지게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오이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분을 잔뜩 머금은 오이, 딱 그냥 시원하게 베어 먹고 싶었다. 그리고 조금 더 정성을 들여서 (노각 무침이나 오이지무침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냥 오이 무침은 가볍게 해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오이를 사 왔다. 토실토실하고 커다랬다. 오이를 박박 닦아 알맞은 두께로 썰었다. 그리고는 동그란 단면의 반을 갈랐다. 인터넷에서 가장 간단해 보이는 양념 레시피를 찾았다. 고춧가루, 간장, 식초, 참기름. 모두 집에 구비되어 있었다. 설탕은 굳이 넣고 싶지 않아서 뺐고, 통깨는 첫 오이무침을 만들 때에는 없었다.
어째 어째 양념 재료들을 한데 넣고 슥슥 섞어주었다. 참기름의 고소한 냄새가 간장의 짠내와 묘하게 범벅이 되었다. 식초 냄새를 타고 고춧가루 향이 진하게 났다. 고춧가루를 너무 많이 넣은 것일까. 매콤하게 맛만 좋으면 됐지 싶었다. 골고루 섞고 맛을 보았는데 무언가 부족한 것 같아서 간장과 식초를 조금씩 더 넣었다. 그러고 나니 음, 완벽하진 않았지만 그럴싸했다.
썰어놓은 오이와 한데 넣고 숟가락 두 개를 이용하여 열심히 섞어 주었다. 뭔가 허전했다. 양파를 잊은 것이다. 서둘러 양파를 꺼내 썰었다. 어찌나 매운지 눈물을 찔끔 흘려가면서. 얇게 썬 양파까지 합세하자, 내가 알던 그 맛이었다. 여름의 맛. 신이 나서 오이 한 조각에 양파 한 조각을 포개어 먹는데, 어찌나 행복하던지. 그 순간만큼은 폭염도 잊은 듯했다.
그 뒤로도 매주 오이를 사고 있다. 여전히 노각무침, 오이지무침의 사진을 보면 마음이 쓰리지만, 오이 무침으로 위로를 받고 있다. 날이 더워 무언가 해먹기도 힘든 날, 그렇다고 무언가를 신중히 골라서 시켜먹을 열정도 없는 날이면 오이무침만 한 게 없다.
또각또각 써는 소리도 어찌나 경쾌하지, 오이를 썰 때 이미 풍겨져 나오는 그 시원함은 또 얼마나 향긋한지. 오이 무침을 완성시켜서 볼에 담고 젓가락을 들었을 때의 설렘은 어떻고. 아, 가장 최근의 오이무침이 이틀 전이었지만 또다시 군침이 돈다. 이 여름이 끝나기 전에 부지런히 오이 무침을 해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