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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맹 Jan 07. 2020

역에서 만나 역에서 헤어질 때까지


충무로 역에서 내려 천천히 출구를 향했다. 일 년을 온통 함께 했던 얼굴을 일 년 반 만에 만나기 위해 한 시간 반의 거리를 전철을 타고 이동했다. 충무로역 5번 출구로 나가는 길은 유난히도 길었다. 일 년을 온통 함께 했던 얼굴을 보기 위해 9시간의 비행을 하고 1시간의 버스를 타고 또다시 30분을 전철로 이동한 너의 기분은 어떨까를 생각했다. 나와 같을까. 일 년 반 전 애석하게 서로를 지워가던 순간을 너도 똑같이 떠올리고 있을까. 출구로 향하는 길은 계속해서 올라가야 하는 길이었다. 에스컬레이터를 오르고, 개찰구를 빠져나가 또다시 계단을 올랐다. 마지막 계단에 발을 디디기 시작하며 계단 끝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아득했다. 너와 나의 사이에 존재하는 계단이 이 세상의 전부 같았고, 끝이 없이 계속해서 올라가야만 할 것 같았다.


우린 언제나 메트로를 이용하여 출퇴근을 하곤 했다. 일부로 나와 출근 시간을 맞추기 위해 20분 일찍 서두르던 너였다. 우리가 이용하던 지하철 역은 Boulogne – Jean Jaures, 황토색을 띤 10호선이었다. 시내에서 조금은 떨어진 주거지역이었고, 길마다 나무가 가득했다. 가까운 곳에 커다란 숲이 있어서 늘 숲의 냄새를 머금은 채로 길을 걷곤 했다. 집에서 역까지는 걸어서 15분 남짓 걸렸다. 몇 개의 와인 샵을 지나고, 치즈 가게를 지나고, 큰 슈퍼마켓 하나, 작은 슈퍼마켓 두 개를 지나는 길, 숲 향기만큼이나 진하게 냄새를 풍기는 빵집을 마지막으로 지나고 나면 역에 도착했다. 전철을 타면 우리는 1 정거장 혹은 6 정거장을 함께 타고 이동했다. 요일마다 출근지가 달랐던 나에게 최대한 맞추기 위해 넌 가끔은 조금 돌아가는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 내가 먼저 환승을 하기 위해 하차하는 날이면, 너는 시내의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나의 뒷모습을 바라보곤 했고, 나는 인파 속에 가려지는 너의 모습을 최대한 오랫동안 눈에 머금은 채 일을 가곤 했다.


5번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네 모습을 계단을 하나씩 오를 때마다 상상했다. 하나의 계단에 네 모습이 그대로 일지를 궁금해했고, 또 다른 하나의 계단에 우리가 주고받았던 말들을 떠올렸다. 어딘가를 정처 없이 헤매고 있거나,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있을 그 말들을 떠올리자 다리에 힘이 조금 풀어지는 듯했다. 함께 찍어주던 사진들, 함께 갔던 다른 도시의 광장들, 그곳의 커다랗던 성당과 산책했던 길들, 함께 마셨던 맥주들을 계단을 하나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떠올렸다. 계단이 끝나갈수록 심장이 뛰었고, 발바닥에는 땀이 났다.


퇴근시간이 일정하지 않았던 나는 일과가 빨리 끝나던 날에는 전철역 근처에서 서성거리며 너를 기다렸다. 너 또한 내가 늦게 일과를 마치는 날이면 저녁을 먹지 않고 전철역 근처로 나와 나를 기다리곤 했다. 나를 기다리는 너의 손에는 자주 아이스크림이 들려있곤 했고, 널 기다리는 내 손에는 와인 한 병이 들려있곤 했다. 복잡한 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빠져나가 마주하는 서로의 얼굴은 아이스크림보다도 달콤했고, 와인보다 진했다.


나는 어느덧 충무로역 5번 출구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가 잃어버린 짐짝처럼 서 있는 너를 발견했다. 너는 출구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하나씩 지켜보고 있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괜히 코를 훌쩍거리며. 그 순간 나는 너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웃는 것도, 찡그린 것도 아닌, 하지만 괜스레 떨리는 마음이 얼굴로 튀어 오르는 것을 자제하느라 입은 꾹 다물되, 얕게 심호흡을 하던 얼굴. 오랜만에 마주한 너는 내 기억 속의 너보다 작아 보였다. 내 기억이 잘못된 걸까, 서울이 크기 때문일까, 아니면 원래 그냥 너는 작은 사람이었던 것일까, 그 작은 사람의 작은 품에 안겼던 날들, 작은 마음이 서로 모여 기억의 꼬리에 꼬리를 물던 많은 나날들. 생각날 때까지 생각해서 그 끝이 헐어버린 얼굴이 서 있었다. 작은 너의 몸뚱이 위로 그 얼굴이.




우리는 그 날, 설렁탕 한 그릇씩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시간도 있었다. 5월의 햇빛을 쐬기도 하고, 그늘 속을 걷기도 했다. 저녁으로 보쌈을 먹었고, 술집에 가서 나의 친구들과 함께 소주를 나누어 마셨다. 서울에서 친구들과 보내는 평범한 주말처럼 하루가 지나갔다. 제법 대화를 나누었지만 기억에 남는 대화는 없었다. 많은 눈빛을 주고받았지만, 충무로역 5번 출구에서 일 년 반 만에 마주한 너의 눈빛만이 기억에 남았다.


충무로역 5번 출구에서 만났던 우리는 사당역 11번 출구에서 헤어졌다.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비행기를 타야 했던 너는 너무 늦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섰고, 나는 친구들과 더 함께 있기 위해 그곳에 남기로 했다. 술집에서 11번 출구까지 300미터 남짓한 길을 함께 걸었다. 우리가 들이킨 소주는 우리의 양 볼에 발그스름하게 맺혀있었다. 5월로 접어들었지만, 밤의 공기는 아직 3월 말의 것과 같았다. 양 볼에 맺힌 소주 기운이 찬 공기를 만나 놀라며 붉은빛을 조금 감추었다. 11번 출구로 향하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너를 보내며 무슨 말을 나누어야 할지 생각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출구에 가까워질 때마다 머릿속은 하얘졌다. 어떤 말로도 충분하지 못할 것 같았고, 어떤 말을 나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나는 개찰구까지 너를 바래다주지 않았다. 사당역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밝은 조명에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충무로역 5번 출구에서 보였던 정의 내리지 못할 표정을 짓고 싶지 않았다. 나의 붉은 볼을, 어찌할 줄 모르는 어깨를, 다시 축축해진 발바닥을 들킬까 나는 그저 출구 앞에서 너와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는 서로를 한 번 안으며 잘 지내라고 인사를 했고, 또다시 애매하게 웃었다. 뒤돌아 계단을 내려가는 작은 너의 뒷모습이 점점 더 작아졌고, 너의 등으로 서울의 밤공기가 계속해서 따라붙었다. 과연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 앞으로 각자의 생을 살아내면서, 서로의 얼굴을 이렇게 다시 마주할 수 있는 날이 있기는 한 것일까? 우리의 사이는 굉장히 멀 것이고, 우주는 너무나도 넓어서 다시는 그 수많은 도시 속에서 너를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공기가 수축되어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우리는 서로를 향해 다시는 걷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힘들게 몇 발자국 내딛는다 해도, 숨이 꽉 막혀서 너의 얼굴을 찾기도 전에 모든 것이 희미해질 것만 같았다. 생각이 야위고, 입술은 퍼레졌다.


계단을 다 내려가 코너를 꺾기 전에 너는 마지막으로 뒤돌아 나와 눈을 맞추었다. 우리는 짧게 손을 흔들어 보였고, 입꼬리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힘껏 올려 보였다. 전철역은 너를 삼켜버렸고, 다시는 내뱉지 않았다. 그 긴 전철역의 목구멍 속으로 너는 긴 여정을 떠났다. 두 볼 위로 따뜻한 눈물 한 방울이 흘렀지만 금세 밤공기 중으로 식었다. 촉촉해진 눈가에 남은 너의 잔상을 조금 더 머금으며 그렇게 5월의 밤 속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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