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지는 것과 스며드는 것의 사이에서

썰물처럼 채워지다 밀물처럼 비워지길 여러 차례

by 오션뷰

여러 번의 순간이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는 헤어질 수밖에 없던 순간들이 있었다. 틈이 없던 간격을 비집고 들어오던 여러 가지 이유들은 나로부터 만들어지기도 했고, 나를 둘러싼 경계 없던 것들로부터 파생되기도 했다. 그 이유들은 순간을 단단하게 만들고, 나는 그 이유의 힘을 믿었다. 막막하지만 설레는 길이 펼쳐지는 순간은 너무도 강렬해서 온통 정신을 빼앗기기가 일쑤였다. 간격은 차츰 벌어져, 양 팔을 가득 벌려보아도 턱없이 부족할 정도로 틈이 벌어졌다. 간격은 너무 멀어져 물리적인 거리를 재기에는 나의 숫자 세는 능력이 부족할 뿐이었다. 한데 뭉쳐있던 것들에서 벗어나, 평생토록 함께 했던 무리에서 벗어나, 속해있던 큰 덩어리에서 벗어나 그렇게 홀로 미끄러운 바닥을 딛고 작은 물방울이 되던 순간들. 처음 한 번에 그치지 않고, 꽤나 여러 번 찾아오던 그 순간들.


큰 덩어리는 자꾸만 멀어지고, 익숙함은 잊어야만 하는 것이 되고, 눈을 돌리니 또 다른 세상이 희끄무레하게 펼쳐져 있었다. 안갯속에 갇혀 있었지만, 안개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만든 것임이 분명해지자 안개를 거둬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게 되었다. 시각적인 것은 다른 모든 것을 쉽게 지배하였다. 어려운 발음의 문장들도, 온도를 측정할 수 없는 목소리도, 만지지 않아도 느껴지던 뾰족한 촉감들도, 두꺼운 옷이 필요하지 않은 계절이 주는 적막함도 모두 시선에 의해 압도당하였다. 나는 단지 보이는 모든 것들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보이던 모든 것들은 내가 있던 덩어리의 세계와는 너무나 달랐다. 모든 것은 새로웠고, 새로웠기에 눈을 뜨게 되었고, 눈을 뜨는 것이 또한 새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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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떠나온 것은 나의 뒤에 남겨졌다. 거기엔 익숙한 모든 것이 있었고, 잘 아는 모든 것이 있었다. 사람, 언어, 음식, 풍경, 날씨, 습관. 뒤에 있는 것은 자꾸만 멀어졌다. 이제는 두고 온 것들을 향해 시선을 던져도, 나의 시선들은 드넓은 또 다른 땅덩이로 고꾸라지기만 할 뿐이었다. 두고 온 것들이 나로부터 멀어지는 것인지, 내가 그것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인지 헷갈려하며 여러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뒤에 있는 것에서부터 차츰 눈을 돌리자, 앞에 있는 것들은 나에게로 더 가깝게 스며들었다.

단계별로 하나씩 눈 앞의 색깔에 물들어갔다. 옷 색이 변했고, 눈빛 색이 변했고, 피부색이 변해갔다. 말하는 온도도 눈 앞의 그들에 맞춰서 여러 차례 바뀌기를 반복했다. 다만 한 번에 맞춰 가기는 쉽지 않아 꽤나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했다. 걸음걸이의 색도, 지하철을 기다리는 모양새의 색도, 매일같이 마시는 커피의 색도 눈 앞의 것들에 맞춰 변해갔다. 가깝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 안에 빠져들었고, 빈 간격을 잴 틈도 없이 흡수되었다. 지나온 시간에서 새로운 시간의 소용돌이 속으로 자꾸만 스며들었고, 나는 이제 다른 시간 속에서 전혀 다른 속도로, 또 전에 없던 동작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그러다 때로는 맘에 들지 않는 것들이 불쑥 찾아왔다. 내 감정을 내가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순간들이었다. 아득한 풍경 속에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게 그려져 있었고, 보고 싶은 것들은 더 이상 너무 멀리 있어서 볼 수 없었다. 검정 도화지가 눈 앞에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지만 모든 보고 싶은 것들은 검정 도화지보다 더 진한 검은색이었다. 볼 수 있는 것이 없었고, 그러다 그리움이라는 것에 지쳐 보기도 했다. 그리움에 사무치는 밤이면 나는 너무나 약해진 마음으로 검정 도화지 위로 몸을 질질 끌며 지나가기도 했다. 나는 마치 집 없는 민달팽이 같았다. 아침이 되고 검정 도화지가 걷히면 온 세상이 밝길 바랐지만, 내 눈앞의 세상은 온통 회색이었다. 회색 거리를 걸으며, 회색 얼굴들을 지나치며, 회색 공기를 마시곤 했다. 난 여전히 내 감정의 주인이 되지 못했고, 볼 수 있는 것보다 보고 싶은 것들이 훨씬 많아지곤 했다. 시각적인 것이 날 지배하는 것보다도 더욱 원초적인 그리움이 회색 도시에 회색 강물 위로 잔잔히 떠내려가곤 했다.


나를 둘러싼 것들은 왔다 가고, 갔다가 오고, 오는 길에 길을 잃기도 했다. 많은 것이 나를 둘러싸고 있지는 않아서 다행이기도 했다. 주변이 일렁거렸다. 눈을 돌리면 모든 것이 함께 차올랐다가, 모든 것이 함께 비워지곤 했다. 썰물이었고, 밀물이었다. 잊을 만하면 다시 돌아왔고, 괜찮을만하면 다시 사라져 버렸다. 꽤나 여러 차례 밀물과 썰물의 간격 속에서 마음을 잃었고, 체온을 잃었고, 감정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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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것들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모든 것은 아무래도 괜찮다는 표정으로 긴장을 풀게 되기도 했다. 마음을 내려놓아도 되는 시간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마음을 내려놓아도 되는 온기가 가까이에 왔기 때문이었다. 밀물과 함께 온 그 온기는 다음 썰물에도 쓸려내려가지 않았다. 난 그 온도에 초첨을 맞춰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괜찮기보다는 그 온기와 내 온기가 함께 하길 바라게 되었다. 바라는 것은 하나둘씩 늘어났고, 그렇게 긴장을 풀어도 괜찮은 순간이 나에게 찾아오기도 했다. 검정 도화지가 다시 온몸을 감싸도 차갑지 않았다. 보고 싶은 얼굴들은 여전히 많았지만, 단 하나의 보고 싶은 얼굴이 바로 옆에 있었다. 여전히 내 주변의 것들은 파도를 따라왔고 또 더 큰 파도를 따라갔지만, 단 하나의 온기를 가진 사람 한 명만은 내 곁에 남아주었다. 아무리 거칠고 가파른 바위들 사이에 있더라도 괜찮았다. 긴장을 풀고 나니, 그 사이를 유연하게 지나가는 것이 비로소 가능해졌다.


새로운 것에 집중했고, 지나간 것에 미련을 버리는 척했다. 새로운 하늘 아래 있다는 것에 자만심을 느꼈고, 만족스럽지 못한 것도 만족스러운 척 포장하기 바빴다. 입에 맞지 않는 음식들도 내가 떠나온 곳과는 그저 다른 것이기에 괜찮은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다 나 자신에 조금 더 솔직할 수 있게 만들어준 온기에 그만 새로운 곳에서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두 발에 힘을 들어가게 해주는 것도, 끼니를 때울 의지를 주는 것도, 회색 도시 속에서도 농도가 서로 다른 회색을 찾을 수 있게 해주는 것도 모두 사람이었다. 언젠가는 각자가 가진 밀물의 속도와 세기와 시기에 맞춰서 서로에게서 멀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엔 시기가 일렀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어지는 온갖 타이밍의 집합체, 그 속에 내가 있었다. 나를 둥그렇게 둘러싼 것에서 시작한 온갖 것들은 제 나름의 속도로 꾸준히 움직이고 있었다. 모든 타이밍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서로를 끌거나 밀기도 하면서, 서로를 떠나기도 서로에게 돌아오기도 하면서 말이다. 모든 타이밍에 일찌감치 결말이라는 순간을 줄 이유는 없었다. 모든 것은 흘러갔고, 또 돌아왔다. 각자의 속도로 그려낸 집합체의 모양은 시시각각 변했고, 그것이 변한다고 해서 순간마다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차차 느끼곤 했다. 떠나온 곳은 여전히 멀었지만, 떠나온 곳이 돌아갈 곳이라는 생각에도 조금씩 싹이 트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무대. 아무리 그 끝을 갉아먹고, 아무리 무대 바닥을 좀먹고, 자꾸만 비워지고 그 속이 드러남에 아무리 황량하더라도 여전히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무대. 거창한 삶도, 초라한 삶도, 그저 그런 삶도 아닌 그저 우리의 무대. 그 위에 고스란히 녹아내린 삶의 무게. 그리고 무게 위로 흘러내린 온갖 타이밍들. 타이밍 사이로 지나가는 온갖 감정들. 그 모든 것이 한데 모여 얽히는 무대. 때로는 조명이 비치지 못하여 그 어떤 감정도 내비칠 수 없기도 하다. 때로는 너무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음에도 준비된 것이 없어 그저 작게 움츠러들기도 하다. 또 때로는 이미 무대를 옮긴 뒤라 타이밍을 탓하기도 하다. 온갖 무게를 잠시 잊으며 무대를 옮겨간 사람들, 떠나고 떠나기를 반복하는 사람들, 강렬한 의지에 매료될 줄 아는 사람들의 무대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또 다른 강렬함을 만들어낸다. 여전히,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각자의 무대 한편에서 썰물이 들어차는 것을 만끽하고 또 밀물을 기다리는 고고한 자세를 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