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삼킨 언어

우리는 지난날을 찾았고, 지난날은 우리를 남겨두고 떠났다.

by 오션뷰

우리는 우리가 있었던 시간들을 찾았다. 함께 녹아내려졌던 곳, 너무나 진하게 녹아내려져서 더 이상 서로를 확인할 수 없었던 지경까지 갔었던 그곳을 찾았다. 그리 넓지 않은 이 곳에서 우리는 모든 곳을 두 발로 걸어 다녔다. 우리는 자주 그랬던 것처럼 해가 지기 전, 어부들이 하루의 일과를 마치려 분주하게 움직이는 수산시장을 찾았다. 수산시장을 지나야 우리가 녹아내렸던 곳으로 향할 수 있었다. 이 곳 출신인 너는 마치 이 곳을 처음 와본다는 듯이 걸었다. 네게는 너무나 익숙한 생선 비린내, 잔뜩 흥건한 땅, 온갖 해산물에 딸려 온 바닷물에 버무려져 진흙이 되어버린 땅을 마치 너는 처음 걸어보는 듯이 조심스러워했다. 행여라도 너의 얇은 신발에 튀길까, 행여라도 네가 신경 써서 입은 재킷에 튀길까 모든 것에 신경을 쓰며 걸었다. 네가 이십팔 년을 지내왔던 곳이지만, 마치 이 곳의 냄새가 처음 맡아보는 냄새라는 듯 너는 계속해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우리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곳을 다시 찾았지만, 더 이상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이야기는 없었다. 바닷물이 테트라포트(Tetrapod)들 사이로 차오를 때마다 이야기를 꺼내려는 나의 목소리가 파도의 소리에 잠겼다. 바람이 휘감아 칠 때마다 이야기를 꺼내려는 너의 목소리가 바람 소리에 잠겼다. 테트라포트들 사이마다 지난 이야기들이 서려있었다. 눈이 내리지 않는 이 곳에서 지난 이야기들은 갈 곳을 잃었다. 구출되지 못하고, 누군가가 들어주지도 않는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서로의 안부를 물었을 뿐, 몇 가지의 근황만 물었을 뿐, 우리의 이야기는 진전이 없었다. 서로의 반응은 싱거웠고, 우리 사이에는 아무리 어루만져도 차가운 온도만이 맴돌 뿐이었다. 그저 흩어져 있는 지난날의 언어들을 바라볼 뿐이었고, 대답 없는 물음을 홀로 삼켜댈 뿐이었다.


저 멀리 국적 모를 한 소녀가 바다로 뛰어들고 있었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은 따사로운 날이었고, 우리는 입고 있던 겉옷을 벗었다. 소녀가 저 멀리서 뛰어들며 지르는 소리가 우리의 귀에까지 닿았다. 우리는 피식 미소 지을 뿐이었다. 소녀의 몸에 철썩거리는 바다 물결 소리만이 우리를 에워쌀 뿐이었다. 손 내밀면 닿을 거리에 있는 서로지만, 우리는 서로의 손을 모른 체했다. 더 이상, 우리에겐 서로를 위해 뻗을 손이 없었다. 어색함을 달래고자 너는 우리가 함께 듣고 불렀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그 노래를 듣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나는 같은 가수의 다른 노래를 듣는다고 하며, 너에게 그 노래를 들려주려고 했다. 너는 듣기를 거절했고, 내가 모르는 새로운 노래를 불렀다. 네가 부르는 노래는 테트라포트에 떨어졌고, 그 사이를 메워 온 바다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기어코 너의 노래는 소녀의 몸에 닿았고, 소녀는 미세하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일몰을 보곤 했었다. 많은 이들이 찾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에 닿기 위해선 몇 가지 장애물을 건너야 했기에 웬만한 사람들이 찾기에 쉬운 곳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곳을 떠난 후로 언제나 이 곳을 그리워하곤 했다. 정확히는 이 곳의 일몰을 그리워하곤 했다. 지난날, 난 이 곳에서 혼자가 아니었다. 지는 해의 모습을 보다가 바로 고개를 돌리면 금방이라도 보고 싶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또 지는 해의 모습을 보다가도 뒤로 고개를 젖히면 수줍게 붉어지는 하늘을 온몸으로 담을 수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일몰의 색에 맞추어 붉어져갔고, 점점 색이 바래지며 보랏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리곤 우리는 채도를 잃어 캄캄해졌다.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함께 차를 마시곤 했던 곳을 찾았다. 작은 가게의 주인은 여전히 같은 사람이었고, 우리는 예전처럼 같은 메뉴를 시켰다. 차를 더 맛있게 마시기 위해 주전자에서 컵으로, 다시 컵에서 주전자로 여러 번 붓고, 다시 따르기를 반복하는 너는 예전과 같았다. 나의 잔에 무심히 차를 따라주는 너의 표정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차를 따르는 너의 손놀림은 예전과 같았다. 네가 따라준 차가 담긴 내 잔의 온도는 예전과 같지 않았다. 여전히 우리는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많지 않았다. 광장의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볼 뿐이었고, 가끔씩 해가 지고 나니 많이 추워졌다는 둥, 바람이 더 심해졌다는 둥의 의미 없는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듣는 이 없는 서로의 말은 공중으로 떠밀려 갔고, 이름 없는 해변에 도달하여 파도의 먹잇감이 되었다.


여름에 따사로이 말리곤 했던 우리의 언어는 가을의 구름을 타고 바위에 부딪혀 소멸되었다. 가을의 위로를 받고자 했던 지나간 기억은 바람을 타고 우리의 옷깃에 서늘히 내려앉았다. 서로에게 맞추려던 눈길은 공중에서 길을 잃었고, 거센 바람에 중심을 잡지 못해 자꾸만 쓰러져갔다. 바다에 뛰어들었던 대부분의 이들이 바다를 떠났다. 모두를 잃은 바다는 차갑게 식어갔고, 밤의 노래는 바닷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공기 중에 맴돌기만 했다. 밤의 노래는 그저 바다의 수면 위에서 자꾸만 미끄러져 갔고, 우리는 그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바닷속으로 가장 깊이까지 들어갔던 소녀는 몸의 물기를 모두 말린 상태였고, 그녀의 살결은 파도의 손길을 잊었다. 한낮의 바다는 그렇게 잊혀 갔다. 오직 바닷속으로 스며들어간 뜨거운 해만이 바다를 품었다. 아주 조용히, 해는 그렇게 차갑게 녹아내렸고 더 이상 노래는 들리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훌쩍 지나간 여름이 순서를 헷갈려 고개를 내밀었다. 너무도 따사로워, 숨어 들어갔던 모든 이들이 밖으로 나왔다. 밤새 담요 속에서도 쉽사리 녹지 않았던 언 발이 아침의 햇살에 비로소 미소를 되찾았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며칠간 마르지 않던 빨래를 바짝 말리기 바빴고, 카페의 테라스들은 몇 달간 묵힌 먼지를 털어내었다. 우리는 더 이상의 계획을 공유하지 않았고, 서로를 향한 질문을 차마 뱉지 못하고 그저 삼켜버렸다. 바람 속으로 뱉어낸 작은 한숨은 지나간 언어들 위로 뽀얗게 내려앉았고, 뜨거운 햇빛에 차갑게 빛났다. 하루 종일 뜨거웠던 날이지만 이상하게도 바다에 뛰어드는 이들은 평소보다 덜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