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에 새겨진 그의 발자국인 것 마냥
앞 뒤로 펼쳐진 하늘의 색은 어제 이 맘 때의 하늘을 쏙 빼가지고 온 것만 같다.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이 피부에 스치는 온기도 어제만큼이나 미지근하다. 해변을 떠도는 고양이 울음소리마저도 어제와 같이 단조롭게 울려온다. 반복된 만큼 두텁게 쌓인 시간의 두께에 새삼 경이로움을 느끼는 아침이다.
멀어진 만큼 작게 보이고, 멀어진 만큼 작게 느껴지고, 멀어진 만큼 적게 공감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지난 시간들. 온전치 못한 이야기를 전할 때의 마음으로, 그렇게 작아진 마음으로, 두서없는 마음으로 작아진 시간들을 늘어놓는다. 그렇게 수줍게 늦은 아침 사이로 지난 이야기들을 펼쳐 말리면, 그 사이로 매일이 따스한 햇빛이 구석구석 비친다. 밤새 펴지 못했던 굽혀진 다리를 이내 서서히 펼쳐보려 하듯이, 작은 배는 한 뼘씩, 또 한 뼘씩 자그맣게 이동하고 있었다. 아무도 눈치챌 수 없지만 바다를 가르는 것이 태어난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그렇게 그 온 힘을 다해 조금씩.
작은 배 위에 중심을 잡고 올라서서, 어제 그랬듯 또 그저께에도 그랬듯 왼쪽으로도 두 번, 오른쪽으로도 두어 번. 자그마한 물결을 만들어 내고, 이내 그 물결과도 작별의 인사를 나누는 한 남자. 작고 작은 작별이 모여, 그가 뒤를 돌아보니 오늘은 온통 이별의 자국들로 넘친다.
돌아보면 너무나 작아서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기억들인데, 아직도 이렇게 마음 한구석에 맺혀 자꾸 괴롭히더니, 언제 이렇게 불어버린 걸까? 바닷물을 온몸 가득 머금었기 때문일까, 흐름이 멈추어진 웅덩이에서 너무 오래 기다렸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쳤다 생각한 눈물이 골짜기를 이루어 기억 속으로도 몇 방울 튕겨 나갔기 때문일까.
그가 응시한 저 먼 곳을 따라, 그를 따라 지나온 모든 것들의 자국이 남겨져 있다. 그가 수면 위에서 조용히 바다를 가르는 시간마다 남겨진 지나온 모든 순간의 흔적들. 깊은 골짜기에 새겨진 예상치 못한 손님이 남긴 것 마냥, 아무도 밟지 않은 올해의 첫눈 위로 몰래 새겨놓은 발자국 마냥, 고운 모래 사이로 희미하게 남겨진 작은 날개 달린 짐승의 발자국이 이내 모래와 함께 딱딱하게 굳어진 것 마냥. 그렇게 매일같이 남겨온 그의 작은 이야기들이 모여 자국을 새겨놓았다. 바다 위에 새겨진 그의 발자국인 것 마냥.
또르르르, 어제와 같은 세기로 젓는 노 끝으로 달려 나가는 박자에, 시간은 계산 없이 해변의 언저리로 달아난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맞춰 기다려 온 소식이 그의 귓가에 도착한다. 높고 낮은 음색에 맞춰 소식을 듣는 그의 표정에도 또한 높낮이가 생긴다. 그가 타고 있는 배 안에 그가 전해 들은 소식이 서서히 가득 찬다. 하나둘씩, 문장들이 차오르다, 몇 문장은 차마 배 안에 담기지 못하고 바닷속으로 이내 미끄러져 사라진다. 그 작은 움직임에 배가 넘실거린다. 아직 그에게 전해지지 못하고 남겨진 문장들은 온통 그의 귓가에 다가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크고 작은 소식을 싣고, 소식의 문장들을 싣고, 문장에 담겨온 온기를 실은 작은 배는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기우뚱거린다. 그에 따라 작은 파도가 만들어졌고, 파도의 손 끝에는 그의 작은 미소가 걸려있다. 미소를 싣고 해변으로 향하는 파도의 움직임이 마치 춤을 추는 것 같다. 새들만이 그 박자를 알아채고, 그 리듬에 맞춰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계속된 파도의 춤은 맑았고, 작게 출렁거릴 때마다 햇빛이 파도에 녹아내리곤 했다. 그렇게 반짝이는 것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참으로 눈이 부셨다.
파도의 춤은 좁고, 때론 넓게 일정한 사이를 두고 불어오고 있었다. 어제 그랬고, 그제도 그런 것처럼. 오랜 시간의 관습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그 간격은 내일 이 시간에도 이렇게 출렁거릴 것이다. 그 균일한 간격은 유지한 채, 오늘만큼의 춤이 내일도 코 끝 간지럽게 불어올 것이다.
오늘과 같고도 다를 내일 바로 지금 이 시간에, 그가 다시 같은 방향으로 노를 젓다가 문득 뒤를 돌아봤을 때, 그러니까 내일은 아픈 이별의 순간보다는 새들이 전해준 오늘의 소식들로 넘실거리는 춤을 마주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