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감이 사라진 현실이 더없이 아름다운 순간
너는 내 주변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어느샌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이미 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새롭게 알아가게 되었다. 믿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또 다른 사고를 갖게 되었고, 차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무의미한 약속들을 믿게 되었다. 억지로 지으래야 지을 수 없던 표정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짓고, 상상하지 못했던 몸짓이 나로부터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탄자니아 키감보니의 이름 모를 해변가. 이름 모를 사람들이 느리게 걷고 있고, 점점 늘어지는 해를 따라 작은 심장을 가진 파도가 길게 기지개를 켠다. 쭉 뻗은 파도를 따라 일렁거리는 바다를 배경 삼아 느리게 걷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다. 스쳐가는 그림자의 그늘이 드리워짐에 따라 너의 미소가 보였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다시 반짝인다.
네가 내뱉는 숨에 따라 주변은 흐려지고 어느새 온통 너로 가득 찬다. 내 눈에 맺힌 상이 너 하나뿐일 리는 없지만, 그래도 내 마음은 그렇게 읽는다. 세상에 써진 모든 오래되어 아름다운 언어는 우릴 비춰주는 별빛이 되고, 세상에 남겨진 따뜻한 구절들이 모여 우리를 덥혀주고, 세상에 모여든 부드러운 날갯짓이 따뜻한 바람이 되어 우리에게 불어온다.
그저 바라만 보다가 시간이 훅 가버리는 것은 비단 바다뿐만이 아니었음을, 두 눈에 제대로 담지 못할까 걱정하며 1초도 눈을 깜빡거리지 않겠다 다짐하는 것은 비단 별똥별뿐만이 아니었음을, 만져도 만져도 그 보드라움이 질리지 않아 자꾸만 만지게 되는 것은 비단 고운 모래알뿐만이 아니었음을.
환하게 웃는 네 미소를 따라 한 번도 불러보지 않았던 노래를 부르고, 그에 맞춰 너는 고개를 끄덕여주고 그에 맞춰 너의 발등 또한 움직인다. 포커스 아웃이 되어버린 너의 주변에서도 빛이 나온다. 네 목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던 주변으로부터 자그마한 탄성이 들려온다. 촉감을 잃어버린 배경으로부터 보드라운 입김이 우리를 감싼다. 현실감이 사라진 현실이 더없이 아름다운 순간이다.
우리의 살갗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우리는 모래 속으로 손을 넣는다. 우리만 아는 작은 구덩이가 생긴다. 지나가는 사람의 그림자가 채워질 수 없고, 파도가 닿지 못할 그곳에 우리만 아는 작은 구덩이가 생긴다. 그곳에 우리는 몇 가지를 담아본다. 알 수 없는 내일이나, 한 달 뒤를 담아 보기도 하고, 오늘의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담아 보기도 하고, 언제 생겼는지 모르는 마음의 굳은살 따위를 담아 보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만 아는 작은 구덩이를 덮어본다. 눈 앞에 선명한 우리만의 순간으로 덮어보기도 하고, 너무나 맑은 오전의 햇빛으로 덮어 보기도 하고, 우리가 함께 바라볼 수평선 너머의 아름다운 것들로 잔뜩 덮어 보기도 한다. 그렇게 키감보니의 이름 모를 작은 해변에는 우리만 아는 전에 없던 비밀이 생겼다.
하고 싶었던 말은 내뱉지 않아도 충분했고, 조마조마한 마음들은 열정을 잃어 시들어버렸다. 세상에 가졌던 의문은 답을 찾지 못해도 그 상태로 충분한 듯 보였고, 어쩌면 모든 의문이 스스로 풀려 고민도 편견도 아픔도 없는 시기가 도래할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거울을 보면 나도 처음 보는 나를 만나고, 그런 내게 더 환하게 웃어주는 네가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