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자니아의 시간] 해변의 여인들 1

그 모든 것을 집어삼킨 언어

by 오션뷰

모든 이야기가 어제와 같아서, 모든 감흥을 잃은 채 또다시 시작된 오후. 느지막이 따라오는 그림자에, 발걸음 또한 제 속도를 잃는다. 감정을 잃은 지 오래, 눈물을 보인지도 오래, 따스함을 기억한지도 오래되어 모든 것에 흥미를 잃고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기대어 살결을 매만질 시간은 늘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마음을 여는 순간 많은 것이 빠르게 도망쳐갔다.

나로부터 도망친 모든 것들은 그 어딘가로 달아나 봄을 맞이했다. 분명한 봄을 맞이하여 뿌리내렸고, 움튼 씨앗을 내게 자랑했다. 그런 것은 멀고도 가까웠다. 그것으로부터 무언가가 만개하기 전에, 나는 애썼다. 보지 않으려 애썼고 듣지 않으려 애썼다. 안다미로 넘쳐 오르는 그것들로부터 시선을 떼기 위해서 나는 애썼다.



한평생 지고 가야 할 짐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그것은 나로부터 나오기도 했고, 애써 꾹꾹 참아왔던 뒤안길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제발 좀 보아달라 보채던 손짓으로부터 나오기도 했고, 꾹꾹 참다 쏟아진 눈물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시야가 흐려지는 만큼 지고 가는 짐은 무거워졌다. 더 많은 힘을 할애하여 짐을 머리맡에 이고,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그 짐과 하나가 되고자 했다. 걸음은 느려졌고 보폭은 줄어들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종종걸음을 내딛느라 하루가 다 지나가기도 했다. 출처 없는 기억들은 계속해서 무게를 늘려 나갔고, 나의 걸음을 짓눌렀다.

말하지 못한 것들을 잔뜩 이고 갔다. 말하지 못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 이내 커다란 짐이 되었고, 감히 모른 척 어디에 두고 갈 수도 없었다. 내뱉지 못한 말 차마 누구에게도 더 이상 나눠줄 수 없어 계속해서 이고 갔다. 몸 깊숙이 눌어붙어 끝내 어디에도 소리치지 못할, 차마 나조차도 제대로 읽어 내려가기 힘든 문장들을 새겨갔다. 읽지도 못할, 기억되지도 못할 문장들은 홀연히 바닷속으로 녹아 내려갔다. 파도에 삼켜지고, 햇빛에 녹아내리고, 바람에 쓸려가 차마 자신의 체취도 남기지 못한 채 그렇게 쓸쓸하게 녹아 내려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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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끝까지 나를 떠나지 못한 문장들은 여전히 나를 맴돌았다. 어깨가 무거워지는 만큼, 하고 싶지만 하지 못했던 말도 단단해졌다. 이렇게 계속해서 걷다 보면 그리운 얼굴 하나 문득 만날 수 있을까? 쉽사리 잊히지 않았던 그 밤 다시 선명하게 보일까? 오래도록 진하게 남아있는 그 냄새 다시 맡아볼 수 있을까? 유독 어두웠던 그 방, 그늘에 늘 가려져있던 얼굴, 파도소리에 귀가 반짝이면 덩달아 조금은 환해지던 그 얼굴. 감정에 휩싸여 지배되던 모든 행동들.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던 눈물, 붉어지는 얼굴, 핑핑 도는 머리, 멈출 수 없이 떨리는 손,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심장.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집어삼킨 언어. 화려하게 품었다가 쓸쓸하게 남겨진 그 언어, 그 언어를 녹여 만들어낸 수많은 문장들. 가슴을 쓸어내리며 읽고 또 읽고, 소리 내어본다. 파도가 삼키지 못한, 햇빛에 녹아내리지도 못한, 바람에 차마 쓸려가지도 못한 몇 개의 문장이 뒤얽혀 있다. 그 아련함이 자꾸만 가슴에 남아, 차마 어디에 두지 못하고 오늘도 어루만진다. 몇 번을 그렇게 어루만지다, 품에 안고 무거운 가슴으로 그렇게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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