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자니아의 시간] 노을 자국

기억은 또 다른 기억으로 잊히지 않았다.

by 오션뷰

그 섬은 기억의 조각들을 먹고 자랐다. 태양을 쫓아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의 기억이었다. 제각각의 온도를 지녔던 사람들은 그 섬에서 모두 같은 온도를 갖게 되었다. 뜨거울 것도 없고, 그리 차가울 것도 없었다. 매일 밤바다는 태양을 삼켜 다음 날이면 삼켜버린 태양의 온도를 모두에게 나누어주었다. 매일 밤바다에 숨어있던 태양은 날이 밝으면 바다의 시원함을 모두에게 나누어주었다. 본래의 온도를 잊은 사람들은 편히 기억을 내려놓았다. 카푸치노가 맛있는 카페의 나무 테이블 틈새로, 다 마셔버린 금색 라벨이 붙은 맥주병의 표면으로, 고장이 나서 닫히지 않는 오래된 차의 창문 너머로.


어느덧 그 섬은 많은 이들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산이 되었다. 파도는 기억의 조각들을 씻겨주고, 씻어진 조각들은 쌓이고 쌓였다. 깨끗이 씻어졌다고 하여, 기억이 마음까지 잃은 것은 아니었다. 꽁꽁 숨겨두었던 지난 이야기가 투명해진 조각 속에서 여전히 숨 쉬고 있었다. 이야기를 잃어버린 기억은 없었다. 조각난 기억일지언정, 일부는 저 멀리에서 여전히 표류하고 있을지언정, 끝내 그 잃어버린 일부를 찾지 못할지언정 그때의 감정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기억의 위로 또 다른 기억이 올라타고, 기억의 아래로 또 다른 기억들이 파묻히고, 기억들의 틈으로 또 다른 기억이 채워졌다. 기억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산은 그렇게 무거워져 갔다.


파도는 계속해서 기억의 산을 향했다. 우기가 찾아와 비가 내리면, 기억의 조각들은 비를 따라 흘러내렸다. 또 한 번의 여정을 기다리는 눈빛으로 가득했고, 잊힌 누군가에게 닿을 거란 기대감은 산을 떨게 만들었다. 비와 파도가 만나는 지점에선 기억의 감정이 폭발했다. 그곳에서부터 많은 눈물이 흘러나오기도 했고, 아련함이나 그리움 같은 닿지 못할 지나간 시절에 대한 향수가 흘러나오기도 했고, 간혹 기억의 존재에 대한 긍정 혹은 부정의 탄성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그것은 지금껏 들어본 모든 악기들을 총동원한 연주였다.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을 듯 한 모든 소리가 한데 엉켜 있었다. 산을 이루었던 기억들은 다시 조각이 되었다. 산을 이루기 전 취했던 모양에서 조금 바뀐 모습의 조각들도 더러는 있었다. 개의치 않았다. 기억은 여전히 뚜렷했고, 다시 한번 떠날 준비가 되어있었다. 어쩌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에, 잃어버린 일부와의 재회를 꿈꾸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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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산이 조용히 무너져 내린 이후, 파도는 제 속도를 찾았고 바람은 파도 위로 그 언제보다도 부드럽게 불었다. 고요하고 따스한 날들이 이어졌다. 섬을 가득 채웠던 기억의 조각들이 남기고 간 자국들 위로 구름이 낮게 깔렸다. 그렇게 구름의 그림자 아래에 자리 잡은 기억 자국들은 서로를 힘껏 껴안았다. 기억은 또 다른 기억으로 잊히지 않았다. 기억이 가진 두께만큼 두꺼웠고, 기억이 가진 넓이를 쏙 빼닮았다. 기억은 그 섬에 자국으로 남아 섬의 일부가 되었다. 그때의 냄새, 그때의 습도, 그때의 긴장감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섬의 일부가 되었다.


기억의 자국 위로 하루 종일 넉넉한 시원함을 베풀던 해가 비쳤다. 마지막 남은 시원함을 온통 기억 자국 위로 쏟아내려 하고 있었다. 마치 잃어버린 기억의 일부처럼 둘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고, 서로가 보지 못한 각자의 여정을 나누는 듯했다. 서로를 품고 세상의 모든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굴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 해는 어김없이 바닷속으로 들어갔지만, 기억 자국 위에 맺힌 노을 자국은 지워지지 않았다. 바다로 들어가지 않고, 변하지 않는 온도를 유지한 채, 비로소 완벽한 자리를 찾은 것처럼. 정말로 그들의 자국은 그렇게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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