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메이맹 Apr 18. 2021

탄자니아에서 내가 살던 집 #2

다레살람의 작은 섬

이사를 결심했다. 여러 번의 결심 끝에 다레살람(Dar es salaam) 시내의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월세로 많은 돈을 쓸 수 있는 형편이 안되었기에 애초에 맘에 바로 들 만한 집은 보지 않았다. 자체 발전기를 가지고 있는 월세 천불짜리 아파트에 들어가 살지 않는 한 전기 나가는 거야 여전할 것이었다. 몇 군데를 돌아다닌 끝에, 누추하지만 웬만한 살림살이들이 소박하게 구비되어 있는 집을 탄자니아에서 남은 6개월 동안 살 집으로 택했다. 집주인과 같은 대문과 마당을 공유하지만 집은 독채로 각자 사용하는 구조였다. 

내가 혼자 지내게 될 작은 집의 문을 열면 발목 높이보다 한 뼘 정도 높은 턱이 솟아있었다. 처음에 그 턱을 넘어가는 게 적응이 되지 않아 여러 차례 의식하며 턱을 넘어야 했다. 혼자 쓰기에 거실은 꽤나 컸다. 한 번도 켜지 않은 작은 텔레비전, 무슨 잎사귀로 엮어 놓은 듯한 소파와 티테이블 세트, 그리고 플라스틱 테이블 하나, 몇 개의 수납장들. 학교에서 살던 집과 마찬가지로 앞문과 뒷문이 창문을 하나씩 끼고 마주 보고 있었다. 정사각형 구조인 집의 5할이 넘는 부분은 거실이, 나머지 부분은 침실과 주방 그리고 화장실이 차지하고 있었다. 


주인아줌마는 60대 정도로 보이는 무슬림이었는데, 대부분 대가족을 이루고 사는 내가 보아온 탄자니아 사람들과 다르게 혼자 살고 있었다. 시내 중심의 시장에서 맞춤복 가게를 운영하고 있어서 그런지 매일같이 화려한 색의 옷을 입고 다녔다. 히잡도 늘 옷과 색을 맞추어 한 세트를 이루었다. 아줌마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고, 해가 지고 나서야 집에 돌아왔다. 초반에 아줌마는 퇴근 후 자주 나를 불렀다. 전기는 각자 요금을 내니 상관없지만 물은 아줌마와 내가 쓰는 양을 합쳐서 둘로 나눠 내기 때문에 최대한 아껴 쓰라는 이야기를 첫 한 달 동안 지겹게 했다. 샤워를 왜 이렇게 매일 하냐 (따뜻한 물이 안 나와서 오래 씻지도 못하는데), 빨래를 너무 자주 하는 것 아니냐 (나는 세탁기도 없는데), 물을 꼭 잠근 것이 맞느냐 하며 직접 화장실과 주방을 체크하기도 하였다. 물탱크의 물을 다 사용하고 물이 새로 채워질 때, 엔진 돌아가는 소리가 어마어마하게 크게 났기 때문에, 주인아줌마는 그때마다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결국 아줌마는 내 물탱크의 자동 충전 버튼을 꺼 놓기도 했다. 본인은 한 번 충전하면 일주일은 넉넉하게 물을 쓰니 나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 뒤로 난 아줌마가 없을 때 자동 충전 전원을 켜서 빨래를 하고, 아줌마의 차가 주차되고 대문이 끼익 닫히는 소리가 나면 방의 불을 끄고 잠든 척을 여러 번 했다.




시내에 살다 보니 마트를 자주 가게 되었다. 냉장고와 주방 선반에는 학교에서 살 때보다 3배는 많은 식재료를 구비해두었다. 아침마다 토스터기에 빵을 구워 햄과 계란, 치즈까지 올려 먹기도 하고, 파스타 면과 소스를 사다가 파스타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된장과 북어가 생겨, 양파를 넣고 북엇국을 끓여 며칠간 먹기도 했고, 인터넷을 보고서 처음으로 제육볶음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엄청난 발전이었다. 게다가 추석을 앞두고 봉사단원을 파견한 단체에서 단원들 모두에게 3분이면 완성되는 다양하고 맛있는 즉석식품들과 캔에 담긴 반찬들을 보내주었다. 선반 위에 그것들을 모두 정리해서 올려 두니,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추석 당일에 그렇게 받은 즉석식품과 더불어 몇가지 음식으로 홀로 저녁상을 차려 선물로 받은 소주를 마셨다. 4년째 가족들과 보내지 못하는 추석이었다. 명절 음식을 원래 많이 좋아하지 않아서 괜찮고, 한국 연휴 긴 거야 탄자니아 공휴일도 만만치 않게 자주 있어서 괜찮았다. 하지만 한국의 가을 날씨가, 부모님 댁의 진돗개 4마리가, 가족들과 함께 먹는 밥 한 끼가 그리웠다. 소주 한 병을 아끼고 아껴 마셨다. 몇 년 전 즐겨보던 한국 드라마를 틀어놓고 소주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에게 건배를 했다. 


학교까지의 거리가 멀다 보니, 우리 팀은 시내에서 각자 업무를 보는 날들도 꽤나 있었다. 재택근무를 하며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자, 난 무엇이라도 더 해보려 안간힘을 썼다. 정규 수업 시간에 있던 미술 시간 이후로는 그림이란 걸 그려본 적 없던 내가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다레살람에서 멀지 않아 주말에 자주 가던 바가모요(Bagamoyo)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인 파듀마에게 리랑가(Lilanga) 스타일의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매우 다양한 색을 사용하고, 인간 본래의 비율을 완벽히 깨뜨리는 스타일이다. 그의 작업장을 기웃거리다가 붓을 잡고 색을 칠하는 걸 도와주다, 이내 그에게 개인 과외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집안 가득 기름 섞인 물감 냄새가 은은하게 스며들었다. 벽에 붙어있던 집주인 아줌마의 취향이 물씬 느껴지는 액자들을 떼어내고, 내가 완성한 3점의 그들을 걸어두자 집에 조금은 더 애정이 생긴 것 같았다.


계속해서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그대로 내가 이 집 속에 파묻혀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런 기분을 달래기 위해 술을 자주 마셨다. 탄자니아에서 마실 수 있는 온갖 맥주는 다 마셨다. 와인은 병째 사다 지쳐, 5L짜리 박스형을 사다 놓았다. 마당에 나가서 줄넘기를 해보기도 하고, 어디선가 얻은 요가매트를 깔고 요가 동작들을 해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젬베(Djembe)를 하나 사다 놓기도 했다. 파듀마가 직접 나무로 만들고, 가죽으로 덮어 만들었는데 수작업이다 보니 바닥에 놓으면 균형이 살짝 맞지 않았다. 아줌마가 집에 없을 때마다 나는 젬베를 치곤 했다. 치는 방법은 몰랐지만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그 박자에 맞춰 손이 가는 대로 소리를 만들어냈다. 표정만큼은 진지했다. 내가 만들어낸 소리가 집안 가득 퍼져, 일렬로 세워놓은 서로 다른 맥주병을 감쌌다. 캔버스 위의 물감이 조용히 말라가며 와인 향을 머금었고, 뒷문에 걸어 놓은 빨래는 섬유유연제 대신 탄자니아의 뜨거운 햇빛의 온도를 담았다.




숏커트였던 머리가 어느덧 조금이나마 묶이는 길이가 되자, 탄자니아에 대우기가 시작되었다. 한 치 앞도 분간을 못할 정도의 비가 거세게 퍼붓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맑아지기를 반복했다. 새해가 밝은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어느 날 저녁, 집에 홍수가 났다. 세 달 만의 홍수였다. 한 시간 정도 미친 듯이 퍼붓던 비에, 지대가 유독 낮은 집 마당은 거의 내 허리 높이까지 물이 꽉 들어찼다. 화장실의 샤워 배수구와 변기에서 하수물이 거침없는 냄새를 풍기며 빠르게, 멈추지 않고 올라왔다. 집주인 아줌마가 양손에 양동이를 들고 모세처럼 물을 가르며 나의 집으로 건너왔다. 우리는 두 시간 동안 함께 똥물을 펐다. 온몸에 똥물이 튀겼지만 멈출 수 없었다. 양동이 끝을 잡은 손가락 마디가 다 헐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햇빛을 잔뜩 머금었던 빨래들은 비에 잔뜩 주눅이 들었고, 나의 집은 다레살람의 작은 섬이 되었다. 비가 멈추고 나서도 똥물에 망신창이가 된 화장실과 거실을 수습하기 바빴다. 온몸에 똥독이 오르는 것 같았다.


다행인 것이 하나 있다면, 두 번째 홍수 때는 정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첫 홍수는 내가 집을 비운 사이 일어났다. 퇴근 후, 문을 열고 턱을 넘는데 무언가 달랐다. 집 안에 물이 가득 차있었다. 냄새가 고약했다. 집안 가득 고인 똥물을 대야를 이용하여 계속해서 퍼냈다. 전기는 이미 나간 상태였는데, 핸드폰 플래시를 비추면 온갖 벌레가 달려들어 그조차도 쓸 수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모기가 들끓기 시작하자, 그대로 집을 버려두고 싶었다. 온몸이 똥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 날의 작업은 끝이 났다. 그 밤,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전기를 기다리며 촛불 앞에서 차갑지 못한 맥주를 마시다 잠이 들었다.


그 이후는 바퀴벌레와의 전쟁이었다. 똥물이 차오를 때 함께 실려온 바퀴벌레들이 집안 곳곳 숨어서 때를 노리고 있었다. 요가 매트 안에서, 맥주병 뒤에서, 수납장 속에서 숨어 나를 놀라게 하기 일쑤였다. 마트에서 살 수 있는 온갖 바퀴벌레 약은 그때 다 써본 것 같다. 하지만 어김없이 새로 출몰하는 바퀴벌레가 있었다. 샤워를 하다가 배수구에서 물의 흐름을 거부한 채 올라온 바퀴벌레였다. 녀석이 다리를 타로 올라오는 바람에 기겁을 하며 샤워 커튼 안에서 바퀴벌레 약을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려댔다. 바퀴벌레보다 내가 먼저 쓰러지겠다 싶을 때에 비로소 그 녀석을 잡았다. 놀란 마음 진정시키며 다시 샤워를 시작하려 했지만, 이미 물탱크의 물을 다 써버린 상태였다. 아줌마가 또다시 물탱크 자동 충전 버튼을 꺼놓은 것이었다. 얼굴 가득 샴푸가, 서러움이, 바퀴벌레 약이 흘렀다. 그 날은 생수로 샤워를 끝낼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홍수 발생일로부터 한 달 뒤, 나는 탄자니아에서 살던 두 번째 집을 떠났다. 한국으로 돌아가기까지 3주 정도의 시간이 더 있었지만 여행을 다니기 위해서였다. 아줌마네 집을 떠나는 날, 아줌마는 웬일인지 출근을 늦게 했다. 마지막 수도요금 정산과 집 안의 물건들은 전날 함께 확인을 마친 터라 나는 의아했다. 아줌마는 초록색 히잡을 쓰고 있었다. 유난히 파란 하늘과 어울리는 색이었다. 그녀는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을,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할 것인지를, 다시 탄자니아에 돌아올 것인지를 물었다. 다시 돌아온다면 꼭 여기서 지내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물탱크, 하수구, 물에 대한 걱정 없이 아줌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으로 함께 사진도 찍었다. 혹시 이 집에 들어와 살 사람이 있다면 본인의 번호를 알려주라고 했지만 나는 대답을 웃음으로 넘기며 아줌마와 처음이자 마지막 포옹을 나누었다.


그리고 3주 뒤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1년 전 탄자니아로 향하던 비행기에서는 몰랐다. 1년 후 탄자니아를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도 울 줄은 진짜 몰랐다. 비행기가 이륙하기도 전에 많은 감정이 뒤엉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런데 갑자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집주인 아줌마였다. 5초간 고민을 하다가 나는 결국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두고 온 걸까? 수도요금 정산이 잘못되었던 걸까? 아니면, 혹시 내가 떠나는 날을 기억해서 전화를 해준 것일까? 끈질기게 울리던 진동이 멈추고 조금 후에 휴대폰을 비행모드로 바꿔달라는 안내 방송이 흘렀다.

탄자니아가 점점 시야에서 멀어졌다. 창을 통해 뜨거운 태양이 스며들어왔고, 두고 온 기억들이 비행기 안에 가득 퍼졌다. 며칠간 뜨거운 햇빛을 머금은 옷을 입었을 때 나던 해의 냄새가 났고, 많은 시간을 보냈던 플라스틱 테이블이 바닥과 마찰을 일으킬 때 내던 소리가 들려오고, 침실의 커튼을 젖혀 내다보던 마당이 눈 앞에 선했다. 와인을 삼킬 때마다 내가 떠난 집의 기억이 하나씩 함께 삼켜졌다. 나는 계속해서 하늘에 대고 건배를 했다.

작가의 이전글 탄자니아에서 내가 살던 집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