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무게와 사십 오일의 무게는 같다.

by 오션뷰

순례자가 되어서 나서는 길. 저마다의 여정을 꿈꾸며 같은 방향과 다른 속도로 걷는 길. 노란 화살표를 따라, 계속해서 서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길. 산길을 지나 평지를 지나 강을 건너고 숲 길마저 지나는 길. 비가 오면 우비를 뒤집어쓰고 걷고, 눈이 오면 손을 호호 불며 털모자를 쓰고 걷고, 햇빛이 강하면 피부를 그을려가며 걷는 길.


길 위에는 저마다의 빛을 발하는 배낭이 있다. 저마다의 모양새로, 서로 다른 색과 무게로 순례자와 함께 길을 나선다. 조개껍데기나 밤새 덜 마른 양말이 매달려 있기도 하다. 순례자들은 가방 안에 긴 여정 동안 필요한 것들을 담는다. 거기엔 누구나 필요한 것도 있고, 각기 다른 이유로 필요한 것도 있으며,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지만 챙기게 되는 것들도 있다.


커다란 가방 안에 물건이 차곡차곡 쌓인다. 누구나 필요한 침낭을 넣고, 잘 마르는 기능성 티셔츠도 넣는다. 누구는 세면도구와 화장품을 종류별로 다 챙기고, 누구는 샴푸와 폼클렌징만 챙기기도 한다. 누구는 다섯 개의 양말을 챙기고, 누구는 단 두 개의 양말만을 챙기기도 한다. 그리울 누군가의 사진 한 장을 가방 속 가장 깊은 곳에 찔러 넣는 이도 있고, 카메라 대신 일기장과 펜을 챙기는 이들도 있다.


길을 따라 갈수록 배낭은 순례자의 어깨를 매섭게 짓누른다. 제아무리 통기성이 좋기로 소문난 가방일지라도 등에 땀방울이 맺혀가는 것은 어쩌지 못한다. 가방의 무게는 십분 전에도 같고, 한 시간 전에도 같고, 나흘 전에도 같았지만 자꾸만 무거워져 가는 것만 같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짐을 덜어내는 이들도 더러는 생긴다. 두꺼운 소설책이라든지, 혹시나 쓰게 될까 찔러 넣은 우산이라든지, 필요할까 싶어 챙긴 무릎보호대가 그 타깃이 된다. 그렇다고 가방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느낌을 받기는 쉽지 않다.


900km의 거리를 걷는 동안 마음이 유독 들뜨고, 발걸음이 유독 가벼운 날이 있다. 그런 날엔 유독 배낭의 무게도 가볍다. 하지만 바람 한 점에도 기분이 새초롬해지고 흘러가는 구름 한 점이 아쉬운 날에는, 괜스레 배낭의 무게가 버거워진다.



그러다 문득 가방의 무게에 익숙해지게 된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더 이상 가방의 무게에 연연하지 않고, 어깨를 짓누르는 아픔에도 무뎌지게 된다. 익숙하지 않던 가방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진 순례자는 온갖 다른 생각할 거리를 챙기기 시작한다. 머릿속은 어느덧 배낭만큼이나 꽉 차게 된다. 어쩌다 이 길을 오게 되었는지로 시작하여, 이 길의 끝에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과, 다치는 곳 없이 무사히 잘 끝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머릿속을 꽉 채운다. 그러면 한결 가벼워진 배낭 속으로 걱정의 무게가 쓱 자리 잡는다.




순례자들은 계속해서 여러 풍경을 지나고, 여러 사람을 만난다. 가슴에 담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함께 웃을 일도 많아진다. 맑은 기억이 그렇게 하루치, 나흘 치, 열흘 치만큼 쌓여간다. 하루 내 만든 기억이 배낭에 닿으면, 다음 날의 길 위에선 배낭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 쌓여가는 기억은 주저하지 않고 배낭 안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다. 하루치만큼 줄어드는 치약의 튜브 사이로, 나보다 더 필요한 이에게 건넨 비상약 봉지 사이로, 차마 다 채우지 못한 배낭의 수납공간 사이로도. 그렇게 순례자의 배낭은 채워지고 덜어지고 다시 채워지기를 반복한다.



새롭게 채워진 기억은 지난날의 기억들에 다시금 생기를 불어넣기도 한다. 철 지난 감정들이 순례자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도 하는 것이다. 두 뺨에 스치는 익숙한 온도에 그 오래전 어떤 날을 회상하고, 길가에 핀 꽃을 따라 사진 한 장으로 남겨진 추억들을 되새기기도 한다.


가끔은 모든 기억을 담아갈 수 없는 날도 있다. 배낭의 용량만큼, 가슴에 남아있는 잔상들을 품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미 많은 기억을 떠나보낸 후라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다. 차마 담지 못하는 기억을 세며 발걸음 하나마다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그런 날이면 밤새 꿈을 꾸는 것이다. 마치 최후의 만찬을 즐기듯, 기억들에 온통 파묻히는 것이다. 꿈결 속을 사뿐히 날아올라, 곧 잊힐 기억과의 마지막 여정을 떠나는 것이다.


지난 기억들이 꿈결 속을 흐르는 동안 아침이 찾아온다. 배낭은 몇 가지의 기억을 잃어 빈 공간을 마련해둔 채 아침을 맞이한다. 알베르게를 떠나 길을 나서면 순례자의 뒤쪽으로 해가 솟아오른다. 하늘이 소리 없는 축제를 펼치기 시작한다. 아직 꿈속에 남은 기억들이 하늘의 축제에 동참한다. 붉은 해는 머뭇거리지 않고 순례자가 두고 간 기억을 집어삼킨다. 해는 더 이상 기억되지 못할 기억을 먹고 더욱 붉어져가고, 순례자는 두어 번 뒤를 돌아보다 계속해서 걷는다. 새로운 기억을 담을 공간을 충분히 마련한 채로, 배낭끈을 꽉 쥔 채로 그렇게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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