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느려지는 이유들
길 위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듣는 질문들.
오늘이 며칠 째야? 오늘은 몇 시에 출발했어? 하루에 몇 킬로미터씩 걸어?
정답 없는 질문들 사이에서 숫자들이 서로의 덩치를 자랑하며 나선다.
크고 작은 부피의 숫자들이 서로 엉겨,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 어렵게 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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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평균 30km를 걷던 그가 어느 날 평소보다 무리하여 40km를 걸었다. 그리고 그는 마치 벌써 무언가를 해낸 것처럼 잔뜩 들떴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신이 오늘 얼마나 걸었는지 아냐는 말을 인사처럼 건넸다. 생각보다 길이 별거 아니라며 그는 하루의 성취감을 만끽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그는 하루에 20km 미만의 거리밖에 이동하지 못했다. 갑작스레 무리한 탓에 놀란 몸이 좀처럼 그의 의지를 따라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처진 몸상태에 화가 났다. 이대로 무너지는 것만 같아 온갖 걱정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걱정이 씻겨 내려간 어느 오후, 한껏 느려진 그의 눈에 비로소 주변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30km씩 걸음을 재촉하며 걸었을 때에는 차마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었다. 그는 감탄을 내뱉으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날의 하늘을 보고, 길가에 수줍게 핀 이름 모를 꽃 한 송이의 사진을 찍었다.
걸음은 자연스레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할 수 있는 한 천천히 걷고 싶어졌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지나쳐 앞서갔다. 따라갈 수 없는 사람들이 저만치 앞서가고 갈 길은 계속해서 쌓여갔다. 하지만 걸어야 할 길보다는 주어진 하루의 몫만큼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셈할 수 없이 늘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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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들이 하룻밤씩 묵고 가는 알베르게. 알베르게에는 한 방에 보통 20명 이내, 많게는 50명이 훌쩍 넘는 순례자들이 한 방에서 잠을 잔다. 순례자들은 '걷기'라는 하루 일과를 마친 후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곤 한다. 하루 동안 걸어서 쌓인 몸의 피로는 그들을 일찌감치 잠에 곯아떨어지게 한다. 밤새 알베르게 여기저기에서 코 고는 소리가 요동을 친다.
아침에 되면, 아니 아침이 되기 전부터 순례자들은 일어나기 시작한다. 아직 밖이 깜깜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헤드랜턴을 켜고 짐을 챙긴다. 그리고 최대한 조용히 침대를, 방을, 알베르게를 빠져나간다. 하루를 빨리 시작하고 그만큼 빨리 끝내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고, 한 여름 낮에는 걷기 힘들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길을 나서는 이들도 있고,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그래야 하는 줄 알고 나서는 이들도 있다.
그녀도 처음 며칠간은 그랬다. 그러던 어느 날, 등산화에 아직 완벽하게 적응을 마치지 못한 발에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다. 걸을 때마다 온 신경이 물집에 집중되었다. 걸음은 자연스레 느려지고, 한 걸음마다 작은 고통이 밀려왔다. 하루의 시작마다 신발을 신는 것도 곤혹이었기에 그녀는 평소보다 자꾸만 늦은 시간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모든 이들이 어둠 속에서 짐을 챙겨 떠나고 그녀만이 덩그러니 남았을 때, 처음에는 혼자 뒤처지고 말 거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리고 그녀는 남들보다 쉬는 시간을 자주 가졌다. 카페가 보일 때마다 들어갔고, 잠시 앉을 곳이 나오면 신발을 벗고 쉬었다. 그렇게 쉬고 있으면 알베르게에서의 불안한 아침을 다시 한번 맞이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내 길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길이 있고, 하루를 더 빨리 시작한다고 하여 길이 더 많은 것을 보여주지도 않을 것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늦잠 자고, 많이 쉬어가는 순례자가 되었다. 등산화에 완벽히 적응을 한 이후에도 그녀는 더 이상 하루를 서둘러 시작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기꺼이 알베르게를 가장 마지막에 나서는 순례자가 되었다. 그리고 온전하게 펼쳐진 그녀만의 길을 그녀만의 속도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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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함께 길을 나섰다. 그들이 가진 시간은 딱 4주였다. 그들은 길 위에서의 한 달을 시작하기 반년 전부터 일정을 짜기 시작했다. 그들은 누구보다 꼼꼼했고, 체계적이었다. 그들은 매일 걸어야 하는 시간, 그리고 그들이 잠을 잘 곳, 저녁 메뉴까지도 정했다. 그들이 세운 계획대로만 움직인다면, 그들은 문제없이 최종 목적지에 딱 4주 만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길 위에서는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더욱 많았다. 날씨가 그러했고, 그들의 몸이 그러했고, 그들이 만난 사람들이 그러했다. 폭우는 그들의 계획에 없던 바르(Bar)에 머물게 했고, 쏟아지는 눈은 그들의 길을 가로막아 그들이 머물고자 했던 알베르게에 닿을 수 없게 했다. 눈과 비를 맞고도 걸어가고자 했던 그들의 의지는 그들이 예상했던 몸 상태에서 벗어나게 했다. 야무지게 종류별로 챙긴 상비약도 그들의 일정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그들은 길 위에서 만난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햇빛을 가릴 요량으로 등산 모자만 챙긴 그들에게, 폭닥한 털로 뒤덮인 따뜻한 모자를 주던 브라질 친구. 기능성 양말만 가진 그들에게, 보드라운 촉감의 수면양말을 건네던 한국인 친구. 평년보다 일찍 추워진 날씨에 어쩔 줄 몰라하는 그들에게, 자신은 필요 없다며 핫팩을 건네던 스페인 친구. 그렇게 그들과 다른 순례자들 사이에 예상치 못했던 관계가 형성되었다. 따뜻하고 끈끈했다. 그들은 그 일정에 없던 사람들로 인하여 새로운 일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들은 결국 한 달 안에 길을 다 걷지 못했다. 그들은 계획보다 사흘 더 걸려서 산티아고의 품에 안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실패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들은 대신 눈부신 시간들을 가지게 되었다. 길을 완주했다고 발행해주는 수료증보다 훨씬 값진 시간들이었다. 그것은 계획에 있던 것들보다도 더욱 진하고 아름다웠다.
여전히 길 위에는 숫자들이 넘쳐난다.
총 며칠 일정으로 왔어? 오늘은 몇 개의 마을을 지나갈 거야? 산티아고 도착 예정일은 언제야?
정답 없는 질문들 사이에서 숫자들은 방향을 잃고 나풀거린다.
감히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길 위에 두고, 그 어느 숫자도 자신이 더 낫다는 확신을 가지지 못한 채 흐드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