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없이도 만나는 사람들

by 오션뷰


어느 작은 마을에 들어섰다. 한 마을을 더 가려면 족히 한 시간 반은 더 걸어야 했다. 물론 아직 두 시간은 더 걸을 수 있는 체력이 남았지만, 며칠째 함께 걷고 있던 나와 J는 그 마을에서 멈추기로 했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순례자들이 잠깐 쉬어갈 뿐 오래 머물지는 않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마을에 있는 알베르게에는 따로 관리자가 상주하고 있지 않았다. 근처의 다른 건물에서 입실 접수를 하라는 안내를 따라야 했다.


유난히도 맑고 조용한 오후였다. 아직 해는 중천이었고, 우리는 마을을 둘러보았다. 기웃거리며 마을을 구경하다 우리는 저 멀리 걸어오는 케빈과 레오를 발견했다. 여러 번에 걸쳐 만나고, 함께 하다 다시 헤어지고, 또 만나기를 반복하던 친구들이었다. 더욱 꼬불꼬불해진 레오의 머리카락과, 언제나 느리지만 정성스러운 케빈의 걸음걸이를 발견하고 우리는 그들에게 달려갔다. 우리 모두에게 한껏 들뜬 오후였다.


알베르게에는 실내 공간보다 훨씬 넓은 정원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곳에서 오후를 보냈다. 햇빛이 가장 잘 드는 곳에 빨래를 널어 두고, 신발을 벗어 두었다. 우리는 고작 사흘을 보지 못했을 뿐이지만 나름 밀린 이야기를 했다. 레오가 따라다니던 금발의 나탈리아는 우리보다 하나 전 마을에 있더라는 이야기도 듣고, 케빈의 가족은 오늘 아버지의 생일 축하를 위해 모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사이 두 명의 프랑스인이 알베르게로 들어섰고, 어느덧 배가 고파진 우리는 저녁거리를 사러 동네의 작은 가게로 향했다.


우리는 이렇게 함께 하는 저녁마다 돌아가며 요리를 하곤 했는데, 그날은 레오가 독일식 감자 요리를 해주기로 했다. 감자를 비롯한 몇 가지 재료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와인까지 집어 들고 알베르게로 돌아갔다. 우리 다음으로 온 순례자들은 파스타를 준비하고 있었다. 저녁 준비가 끝날 때 즈음 폴란드인 한 명이, 식사를 시작하고 얼마 있지 않아 스페인인 한 명이 도착했다. 알베르게의 마지막 손님이었다. 밖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고, 마지막 순례자는 많이 지친 모습이었다.


알베르게에의 다이닝룸에는 10명이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식탁이 있었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레스토랑도 따로 없는지라 우리는 늦게 온 순례자들까지 불러 함께 식탁에 둘러앉았다.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고, 며칠 전 지나가며 ‘부엔 카미노! (Buen Camino!)’ 라며 인사를 건넸던 순례자도 있었다. 식탁 위에는 레오의 감자 요리와, 프랑스 순례자 둘이 만든 파스타, 폴란드 순례자의 배낭에서 나온 빵과 과일 그리고 스페인 순례자가 꺼낸 치즈가 있었다. 여덟 명의 주린 배를 채우기에 그리 넉넉한 음식은 아니었지만 크게 부족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서로 다른 모양의 컵을 각자의 앞에 하나씩 두고 있었다. 잔 안으로 우리의 와인과, 다른 이들이 준비한 와인, 마지막 순례자가 꺼낸 위스키까지 차례로 채워졌다. 하루 내 걸었던 몸에 뜨거운 알코올이 들어가자 금방 노곤 노곤해졌다. 길 위에서 계획 없이 만난 이들이, 각자가 준비한 먹을거리와 마실거리들을 내놓은 저녁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는 자연스레 각자의 이야기를 하나, 둘씩 꺼내기 시작했다. 그곳엔 전직 군인도, 안식년 중의 교사도, 갓 대학을 졸업한 사회초년생도, IT 종사자도, 가족의 업을 물려받은 농부도 있었다. 그토록 다양한 삶을 살아온 이들이 모인 저녁이었다. 서로 다른 도시에서 서로 다른 모습과 표정으로 살아오던 이들이 모인 알베르게였다. 공통점이라고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이들이 길 위에서 함께 하는 하룻밤이었다. 길을 떠나기 전 각자의 모습이 아득하게 그려졌다 금세 지워졌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길 위로 흘러 들어온 이유를 식탁 위로 늘어놓았다. 서로 다른 모양과 질감의 이야기들이 펼쳐졌다. 누구는 동독 자신의 집 앞에서부터 걷기 시작해 어느덧 길 위에서의 다섯 달째를 맞고 있었고, 누구는 10대 때 짧은 코스로 걸었던 이 길이 잊히지 않아 다시 걷는 중이라고 하였다. 마약 중독이었던 자신의 형이 길지 않은 생을 마쳐, 그를 애도하고자 걷는 이도 있었고, 두 번의 자살 시도 후에 가까운 친구의 추천으로 이 길을 시작했다는 이도 있었다. 그저 새로운 경험이 필요했다고 말한 이도 있었고, 큰 빚을 다 갚은 기념으로 긴 여행을 떠나왔다는 이도 있었다.


식탁 위로 절제된 감정들이 길게 뻗었고, 몰랐던 이들에게 가까이 닿았다. 서로 다른 이유들이 질서를 지켜 줄지어가고, 우리는 서로에게 느슨하게 섞여 들어갔다. 우리는 어떤 대화든 나눌 수 있었고, 어떤 대답이든 할 수 있었다. 서로에게 따뜻한 눈빛을 건네며 위로했고, 빈 잔을 채워주며 마음을 표현했다. 햇빛으로 붉어진 우리의 얼굴이, 서로의 마음을 담아 더욱 붉게 빛이 났다. 작은 마을로 모여든 이야기가 그렇게 우리의 밤을 따뜻하게 수놓았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이미 몇 명은 길을 나선 뒤였다. 함께 했던 지난밤을 뒤로하고, 각자의 오늘이 시작되었다.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잔을 기울였던 이들이 다시 길 위의 순례자가 되어 각자의 속도와 리듬으로 걸어 나가는 아침이었다.


지난밤의 만남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고, 앞으로의 질긴 인연의 시작일 수도 있다. 또다시 만나도 이름을 기억해내기 쉽지 않은 이들도 있을 것이며, 하루만 보이지 않아도 소식이 궁금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모두 한 곳의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고, 그곳으로 향하는 길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한, 우리는 이곳에서 또는 저곳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약속 없이 만나도 자연스레 저녁을 함께 차려 먹듯이, 지난 이야기를 나누고, 각자의 같고도 다를 가까운 앞날을 그려볼 것이다. 작별 인사를 나누기에는 너무 이른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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