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싸위라에서 내가 사랑한 것들 #1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는 하늘에 나는 처음도 마지막도 없는 그림을 그렸다

by 오션뷰




에싸위라(Essaouira)에서 내가 지내던 리아드(Riad)의 가장 저렴한 방에는 창문이 없었다. 샤워기가 달린 벽 상단에만 작은 창이 나 있었을 뿐이었다. 빨아 널어놓은 속옷들은 마를 기미가 안보였고, 마음은 그들을 따라 눅눅해져만 갔다. 에싸위라 초겨울의 밤은 상당히 추웠다. 침대에 가만히 붙어 이불속에 들어가 있으면, 비어있는 휑한 방 한가운데에 한기가 돌았다. 웅크리고 지낸 밤이 지나고 기지개를 켜자 온 몸은 아침을 향해 뻗었다.


어두운 살롱에서 조식을 먹고 신나게 나갈 채비를 하였다. 매일 아침이 김밥을 싸서 소풍이라도 가는 마음이었다. 이방인인 내가 오전마다 머물 곳이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든든한 일이었다. 몇 가지 물건을 챙겨 가방을 메고 신발을 신을 때는 늘 흥분이 고조되었다. 리아드 밖을 나서자 온 몸으로 햇빛이 비춰, 나는 다른 색이 되어 있었다.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티셔츠도, 하물며 신발도 다른 색으로 변했다. 초겨울에 접어들었지만, 햇살은 여름의 것만큼이나 따사로웠다.


익숙한 듯 아침의 골목길을 가로지르면, 하루를 시작하는 상인들의 활기참이 묻어났다. 몇몇은 아는 체를 하며 가볍게 인사를 건넸고, 몇몇은 인사보다도 진한 눈빛을 전해왔다. 그 눈빛들이 카페로 향하는 길을 더욱 아름답게 해 주었다. 발걸음은 가벼웠다. 카페로 향하는 길을 조금 더 즐기고 싶은 마음과 빨리 카페에 도착하여 마음에 드는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엉겼다.




에싸위라 해변의 초입에 들어서자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넋을 놓게 하는 하늘을 매일 볼 수 있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해변의 귀퉁이에 꽤나 오랜 시간 자리하고 있는 카페에 들어섰다. 3년 전에도 자주 찾았던 곳. 해변을 향해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늘어져 있는 테이블들. 나는 최대한 해변 가까이에 자리한 테이블 중 햇빛이 적당히 비치며 그늘도 형성하고 있는 자리를 골라내었다. 웨이터가 내게 오면 음료를 주문했다.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해도 나는 그를 충분히 알아보기에 홀로 반가움을 느꼈다. 기억나는 몇 개의 인사말을 주고받으며, 민트 티와 커피 중에 무엇을 마실지 행복한 고민을 했다. 그러는 사이 새하얀 앞치마를 두른 노년의 웨이터는 테이블 위에 바닷바람이 쓸어 온 모래를 행주로 닦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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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최대한 편한 자세를 잡고 앉아 크게 심호흡을 했다. 완벽한 오전이었다. 내 앞에는 고운 에싸위라 해변의 모래가 있었고, 그다음은 바다, 저 멀리 보이는 또 다른 곳, 그리고 하늘. 드넓은 하늘이 오전의 고요함을 머금고 차분하게 그리고 가득 차올라 있었다. 밤새 나를 웅크리게 했던 검은 하늘이 맑은 도화지가 되어 눈 앞에 가득했다.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는 하늘에 나는 처음도 마지막도 없는 그림을 그렸다.


그것은 상상이기도 했고, 지난 기억이기도 했다. 출처 없는 꼬리표를 달고, 온갖 이름으로 무장한 채 다채로운 이야기가 펼쳐졌다. 하늘 위로 그려낸 그림은 구름의 허리에 올라타 자꾸만 남쪽으로 흘러갔다. 계속해서 새로운 페이지가 눈앞에 펼쳐졌고 철 지난 기억들은 자취를 감췄다. 하늘로 스며들었고, 파도의 등에 업히기도 했다. 하고 싶었던 말은 그림이 되어 바닷바람에 작은 춤을 추기도 했고, 숨겨놓은 이야기가 되어 아침에 찍힌 누군가의 발자국 위로 흘러내리기도 했다. 넘쳐흐른 이야기는 내가 마시고 있는 민트 티가 담긴 컵에 장난스레 퐁당 빠지기도 했다.


민트 티를 다 마시고 나면 화이트 와인 한 잔을 주문했다. 늦은 점심을 먹기 전 식전주 한 잔 하면 딱 좋을 시간이었다. 어느덧 교대가 되어 키가 더 크고 체구가 있는 웨이터가 와인 한 잔과 연둣빛 올리브를 작은 종지에 담아서 갖다 주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내가 도착했을 때보다 많은 테이블이 채워져 있었다. 전화로 이곳저곳의 안부를 묻는 이도 있었고, 진한 에스프레소를 두 잔 째 들이키며 무언가에 열중인 이도 있었고, 빈 의자 위에 발을 올려 누울 듯한 자세로 담배를 피우는 이도 있었다. 그 모두가 카페의 또 다른 이야기였고, 오늘의 그림이었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시자, 하늘이 와인을 따라 투명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투명한 구름이 머리 위에 잔뜩 깔리기 시작했다. 촘촘한 구름도, 그렇지 못한 구름도 그들만이 알 수 있는 가지런한 질서 속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에싸위라의 햇살은 구름을 지나 모두에게 쏟아졌다. 눈 부신 오후가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눅눅한 마음은 바다의 향기를 품은 채 곱게 건조되었다. 고르게 퍼지는 햇살은 아직 여운이 채 마르지 못한 기억의 감정을 서서히 말려갔다.


오후의 따스함은 익숙하게 카페 곳곳에 내려앉아, 오후를 시작하는 모두의 곁을 지켰다. 웅크렸던 밤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한낮의 온기로 기억을 잔뜩 채웠다. 해가 완벽히 우리의 위에서 아주 조금씩 서쪽으로 기울어 그늘의 면적이 달라졌다. 그늘에 가려졌던 테이블에 옅게 쌓인 해변의 모래 위로도, 비어진 와인 잔 위로도, 포개 놓은 몇 개의 올리브 씨 위로도 햇빛이 포근히 내려앉았다. 밤이면 그리워질 햇살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은 마음에 나는 오래도록 카페를 떠나지 못했다. 모서리가 없는 창문을 향해 그 언제보다도 마음을 활짝 열어 내가 담긴 풍경 속에 섞여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