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케시의 밤, 택시에 탑승한

그 모든 생생하고도 뭉개진 기억을 싣고

by 오션뷰


온갖 기억을 지나간다. 기억되지 않으려 묵혀둔 것들을 애써 꺼내어 새삼스럽게 마주해본다. 거리감이 느껴지는 창 밖의 기억들이 멀고도 가깝다. 기억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하여, 또다시 감정에 휩쓸리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괜찮다고 여길 수 있는 그 거리를 계속해서 유지한다. 창 밖으로 기억이 노크를 하고, 손자국을 내어 보기도 한다. 창에 대고 입김을 불어 생각을 뱉어본다.


창 밖으로 보이는 마라케시(Marrakesh)의 모든 풍경이 흐려진다. 초점을 잃고 한데 뭉개진다. 뭉개진 풍경이 밤의 택시에 탑승한다. 바깥의 온갖 색을 뒤덮은 승객이 뒷좌석에 거리낌 없이 섞여 들어간다. 모든 색이 함께 흐려지다, 함께 뭉개지고, 함께 빛난다. 거리의 조명과 거리 위의 자동차들이 뿜는 라이트가 그 위를 덮는다. 그들은 달리는 차를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아가기도 하고, 저 멀리 간 차를 눈으로 열심히 좇다 말기도 한다.


여러 날의 뜨거움을 지나, 곱지 않은 바람을 맞은 기억은 그새 많이 까끌해져 있었다. 잘 알고 있던 얼굴이라 하기엔 낯설었고, 냉정하다 말하기엔 그의 작은 숨에 안도감이 들었다. 이토록 작은 공간을 함께 나누며 그 안에서 각자의 숨을 뱉어 내었다. 지난 이야기를 꺼내는 대신 침묵을 선택했고, 서로 눈길을 건네기보단, 창 밖의 마라케시 밤의 색을 바라보았다. 시간은 무디지만 빠르게 흘렀고, 함께 기댄 언어는 온도를 잃어갔다.


방향을 읽지 않고 움직이기만 하면 될 줄 알았던 그 언젠가의 시간도 끝이 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끝이라는 단어는 완벽하게 낯설었고 모든 감정을 메마르게 했다. 또다시 눈에 들어올 것 같던 이정표도, 계속해서 무거워지는 마음의 짐도, 어느덧 풍경에 꼭 어울리는 기억도 끝이라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꾸준히 어딘가로 향하다 보면 어느새 나타나는 갈림길, 잊힌 줄 알았던 고통이 다시 되살아나는 끝없는 평지, 오르막의 고고함과 내리막의 유혹 사이에서의 갈등.



그 모든 생생한 기억을 안고 세상의 가장 깊은 밤 속에서 택시는 방향을 돌렸다. 늘 그래 왔듯, 모든 것은 한순간이었다. 택시가 방향을 돌린 것도, 우리가 할 말을 잃은 것도, 지금껏 가졌던 온기가 차가운 밤 바닥에 떨어진 것도. 기억은 택시의 방향을 더 이상 좇지 못했다. 빛나는 도시의 채도에 눈은 익숙함을 잃었고, 다시 돌아가는 길은 마치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하는 것처럼 어렵게만 느껴졌다.


차곡차곡 쌓아 올려, 한 겹씩 맛을 음미하던 기억들은 바퀴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남겨지기 싫어 울부짖던 소리는 자동차의 엔진 너머로 묻혀버렸고, 빗소리에 잠겨버렸다. 비를 타고 흐르고 흘러, 홑겹의 이름 모를 꽃에 맺혔을까, 누군가의 우산에 맺혔을까, 인적이 드문 길가에 맺혔을까? 흐르고 흐르다 기억이 희석되어 아픔도 지워져 다시 눈부신 대낮에도 당당히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을까?


그렇게 다시 온갖 기억을 지나간다. 두고 온 이야기, 잔가지처럼 잘린 이야기, 사소하다 여겨지던 이야기들이 맺힌 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창문을 살짝 열어 손 끝에 빗방울들이 흐르게 둔다. 차갑고 말랑한 촉감에 작은 신경이 돋아난다. 이렇게 작은 기억이었구나, 이렇게 사소한 감정이었구나, 이렇게 마른 대화였구나. 시간이 지나간 자국 위로 데구루루 구르는 작은 빗방울들이 계속해서 흐르게 두었다. 그렇게 창 밖의 풍경은 거리를 두고 기약 없는 밤은 끝을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