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무사하기를...

수천 명의 낯선 전문가들이 쌓아올린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by 조성우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아이를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 나는 별로 무섭지 않습니다. 옆 차가 갑자기 끼어들어도, 빗길에 브레이크를 밟아도, 이 차가 나를 지켜줄 거라는 믿음이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어서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믿음은 어디서 왔을까요.

독일에서 만들어진 차가, 일본 공장에서 조립된 부품을 달고, 한국 도로를 달리는데 —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걸까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귀가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 답은 WP.29라는, 조금은 낯선 이름의 국제 약속 안에 있습니다. 유엔 자동차기준조화포럼이라는 공식 이름보다, 저는 이걸 이렇게 부르고 싶습니다. 전 세계 국가들이 맺은 '안전에 관한 공동 서약'이라고요.



두 개의 약속, 하나의 마음


이 포럼을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이 있습니다. 각각 1958년과 1998년에 만들어진 협정인데, 숫자만 보면 딱딱하게 느껴지지만 그 속에는 아주 인간적인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1958 협정은 일종의 '신뢰 공동체'입니다. 한 나라에서 안전 인증을 받으면, 다른 나라도 그걸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죠. 유럽과 일본을 포함한 58개국이 참여하며, 우리나라는 2004년에 이 신뢰의 공동체에 합류했습니다.

그런데 미국, 캐나다, 중국처럼 독자적인 방식을 가진 큰 나라들은 당장 그 신뢰를 교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게 1998 협정입니다. 서로의 인증을 당장 인정하긴 어렵더라도, 최소한 기준 자체는 같이 만들어 보자는 타협이었죠. 우리나라는 2001년, 이 협정에도 먼저 이름을 올렸습니다.

완벽한 합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함께 나아가기로 했다는 것. 어쩌면 국제 협력의 가장 솔직한 모습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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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하루를 지키는 여섯 개의 그룹


협정을 바탕으로, 전문가들은 여섯 개의 기술 그룹으로 나뉘어 우리의 일상을 아주 꼼꼼히 들여다봅니다.

자율주행 분과 — 차선 유지 보조, 긴급 자동 제동. 기계가 대신 판단하는 순간의 기준을 만듭니다.

충돌안전 분과 — 안전벨트 하나, 어린이 카시트 하나. 사고 순간 가족을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

일반안전 분과 — 화물차 사각지대 경고, 디지털 키의 보안. 눈에 띄지 않는 위험을 먼저 봅니다.

등화장치 분과 — 내 전조등이 마주 오는 운전자의 눈을 부시게 하지 않도록. 서로를 배려하는 빛.

오염에너지 분과 — 배기가스는 물론, 브레이크와 타이어에서 나오는 미세먼지까지. 아이들이 마실 공기.

소음타이어 분과 — 빗길 제동 성능, 조용한 전기차의 후진 경고음. 소리로 지키는 보행자의 안전.

이 여섯 팀의 전문가들이 회의하고 논쟁하고 합의하는 동안, 우리는 그냥 출근하고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장을 봅니다. 그 일상의 평온함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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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대를 잡을 때 떠오르는 것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사랑이란 게 꼭 얼굴을 마주 보며 건네는 것만은 아니라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누군가가 내 아이의 카시트 강도를 계산하고, 빗길에서 내 차가 얼마나 빨리 멈춰야 하는지 밤새 시뮬레이션했습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 사람의 노력이, 지금 이 순간 나와 내 가족을 지키고 있습니다.

자동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닌가봐요. 그 안에는 수십 년에 걸친 국제적 신뢰와 협력, 그리고 서로 모르는 사람들 사이의 보살핌이 겹겹이 쌓여 있으니까요.


다음에 시동을 걸 때, 잠깐 눈을 감고 생각해보세요. 당신이 오늘도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낯선 이들의 마음을.

세상은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손길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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