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神과의 결별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세상은 너무나 서슬 퍼렇고 생생하다. 눈앞의 고통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살을 파고드는 칼날이며, 타인과 부딪히며 느끼는 분노는 혈관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독이다. 하지만 나는 묻는다. 이 지독한 고통을 느끼는 '나'라는 존재는 과연 실재하는가?
어떤 이들은 세상이 고도로 설계된 시뮬레이션이나 깨어날 수 없는 집단 최면, 혹은 거대한 꿈이라고 말한다. 악마에게 다리를 물어 뜯기는 꿈을 꿀 때, 그 공포와 통증은 너무나 생생해서 꿈속에서는 그것이 허구임을 알 도리가 없다. 뇌신경과학자들 역시 '자아'라는 고정된 실체는 뇌의 작용이 만들어낸 착각에 불과하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몸뚱이와 감정의 덩어리를 '나'라고 굳게 믿으며, 그 가짜 신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고통받는다.
동양의 지혜, 특히 노자가 말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은 특별한 도인의 경지가 아니다. 그것은 원래부터 '하는 자' 없이 저절로 일어나는 삶의 실상을 뜻한다. 인연 따라 잠시 모인 것들이 작용하다 흩어지는 것이 인간 세상의 전부라면, 우리가 쥐고 흔들리는 이 수많은 고민과 원한은 얼마나 덧없는 환영인가. 힌두교의 쉬바(Shiva) 신은 파괴의 신인 동시에, 진실을 꿰뚫어 보는 통찰 그 자체를 상징한다. 쉬바가 진실의 칼로 가짜 신인 '나'의 목을 치듯,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적 구분이 사라질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지독한 꿈에서 깨어날 수 있다.
‘나’가 없으면 ‘내 것’도 없다. 주관이 사라지므로 객관도 사라진다. 나와 남의 구분이 오직 현상적으로만 드러날 뿐, 그 어디에도 고정된 좌표를 찍을 수 없게 된다. 내 것과 네 것, 선과 악, 옳고 그름,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이 힘을 잃는다. 이 실상이 가슴 깊이 와닿을 때, 비로소 ‘나’라는 분별마왕이 죽고 꿈은 끝이 난다. 그렇다면 누가 깨어나는 것인가? 나는 없다면서? 그렇다. 주객으로 나뉘지 않는 바로 지금, 이 눈앞의 즉각적인 ‘실상’이 스스로 깨어나는 것이다. 이 실상은 시작도 끝도 없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오직 우리의 생각만이 분리와 고통을 만들어낼 뿐이다.
물론 이런 철학적 사유들이 일상의 서슬 퍼런 고통을 즉각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나 역시 주워듣고 읽은 말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지만, 정작 도로 위에서 스마트폰을 보며 다가오는 인간을 마주하면 여전히 피가 거꾸로 솟는다. 자아의 해제, 깨달음, 해탈… 이런 근사한 말들은 어쩌면 인간의 헐떡거림을 잠시 가라앉혀주는 진통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던져진 이곳은 그만큼이나 지독하게 생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암울한 게임'의 막바지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무엇인가? 거창한 구원을 바라기보다, 차라리 주어진 삶을 '가볍게' 살아내는 것이다.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지나친 욕망이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끊임없이 견제하는 것. 많이 가졌으면 가진 대로, 몸이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주어진 숨을 그저 천천히 쉬어가는 것뿐이다.
‘비교 금지’와 ‘탐욕 금지’. 이 두 가지는 나라는 에너지가 미쳐 날뛰지 않도록 붙드는 유일한 안전장치다. 우주의 먼지보다 작은 인간이라는 종으로 태어나, 잠시 이 시뮬레이션 속을 걷다 가는 여행자로서 내가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지혜는 이것이다. 거창한 깨달음은 몰라도 좋다. 그저 오늘 하루, 나를 괴롭히는 그 가짜 신의 목소리에 속지 않고 담담히 걷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 지옥 같은 세상은 조금은 견딜 만한 곳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