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본인이 원할 때만 구원이다

선의라는 이름의 월권

by Lucid

지난 글에서 영화 <플랜 75>의 서사적 결함을 짚었다면, 이번에는 그 감상주의 이면에 숨은 사회적 오만함을 파고들어 보려 한다.


영화 <플랜 75>를 보고 느낀 배신감을 기록한 뒤,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왜 감독은, 그리고 우리 사회는 죽음의 문턱을 넘으려는 노인의 손을 끝까지 붙잡으며 그것을 '구원'이라 칭하는가. 그들이 간과하는 치명적인 사실이 있다. 누군가를 구하겠다는 그 뜨거운 선의가, 누군가에겐 생애 마지막 주체성을 짓밟는 '월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나의 이런 시각을 두고 노년의 가치를 폄하하는 냉혈한이라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리 밝혀두건대, 나의 이 서늘한 주장은 혐오가 아닌 극진한 존중에서 기인한다. 나는 노년을 '보호받아야 할 잔여 수명'이 아닌, 자기 삶의 마침표를 직접 찍을 자격이 있는 '완성된 인격체'로 대우하고 싶을 뿐이다.


노년을 '바보'로 규정하는 오만함


영화의 시선은 시종일관 시혜적이다. 시스템에 신청서를 내미는 이들을 '교묘한 마케팅에 속아 넘어간 희생자'로 규정한다. 그래서 조카 히로무가 삼촌의 시신을 탈취하고, 주인공 미치코가 수용 시설을 박차고 나가는 것을 '세뇌에서 깨어난 인간의 승리'로 묘사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물어보자. 그들은 정말 속은 것일까? 70년, 80년의 세월을 살아내며 온갖 풍파를 겪어온 노련한 어른들이, 단지 친절한 상담원과 세련된 팸플릿에 홀려 자신의 생을 포기할 만큼 어리석단 말인가.

노인을 '판단 능력이 흐려진 피동적 존재'로만 보는 이 시각이야말로 지독히 오만한 연령 차별이다. 삶의 고락을 다 겪고 '이 계절이면 충분하다'고 선언한 통찰의 무게를, 사회는 왜 감히 '바보들의 선택'으로 격하시키는가.


삶은 분명 고귀하다. 누군가 100살까지 삶의 의지를 불태운다면 그것은 마땅히 경외받아야 한다. 그러나 내가 분노하는 지점은 '살려는 자'를 죽이는 시스템이 아니라, '떠나려는 자'를 기만하는 사회의 오지랖이다.


진짜 반론과 마주하기


여기서 나는 가장 강한 반론을 직접 꺼내놓겠다. '자유로운 선택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구조적 압박의 산물일 수 있다. 빈곤, 고립, 우울, 사회적 배제 — 이런 조건들이 노인을 죽음으로 등 떠밀고 있다면, 그것을 자기결정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건 무시할 수 없는 질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반론을 정면으로 받는다.

맞다. 사회가 노인을 빈곤과 고립 속에 방치한 뒤 '당신의 선택을 존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다. 플랜 75가 현실이 된 사회에서, 가난한 노인이 느끼는 압박은 분명히 실재한다. 구조적 폭력을 자기결정권으로 세탁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적인 구분이 필요하다.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 구조 속에서도 자신의 마침표를 스스로 결정한 이들의 선택을 무효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전자는 사회의 책무고, 후자는 개인에 대한 침범이다. 우리는 구조를 개선하면서, 동시에 개인의 결정을 존중할 수 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별하는가? 그것은 절차의 문제다. 충분한 시간, 반복적 확인, 심리적 지원, 물질적 대안의 제공 — 이 모든 과정을 거친 뒤에도 유지되는 결정이라면, 그것은 존중받아야 한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안락사 제도가 작동하는 방식이 바로 이것이다. 그 절차를 설계하는 것이 사회의 역할이지, 최종 결정을 뒤집는 것이 사회의 역할이 아니다.


퇴로를 막는 자들


문제는 사회가 '약자'를 구하겠다는 명분으로 만든 감상적인 칸막이들이, 정작 충분한 숙고 끝에 결정을 내린 이들의 마침표를 무참히 망쳐놓는다는 점이다. 조카 히로무의 행동을 보라. 그는 삼촌을 구했다고 믿었겠지만, 사실 삼촌이 생의 마지막 에너지를 끌어모아 완성하려 했던 '존엄한 의식'을 무력으로 탈취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타인의 철학에 대한 무례한 침범이자 폭력이다.


나갈 문을 억지로 걸어 잠그는 배려는 저주보다 가혹하다.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있는 주체적인 인간에게, 국가나 가족의 허락 없이는 죽지도 못하게 만드는 구조는 복지가 아니라 '감옥'일 뿐이다. 진정한 자비는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다. 상대가 문을 열고 나가겠다는데, 내 마음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 문을 막아서는 것이야말로 가장 이기적인 감상주의가 아닐까.


진정한 존엄은 선택권에 있다


나는 무조건적인 죽음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존엄은 '살 권리'만큼이나 '그만둘 권리' 또한 동등하게 보장받는 상태다. 우리는 언제까지 노년을 '보호하고 깨우쳐야 할 대상'으로만 가둘 것인가. 진정한 휴머니즘은 그들을 다시 삶의 현장으로 끌고 나와 억지로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내린 마지막 결정이 비록 소멸일지라도, 그 결정의 무게를 온전한 성인의 것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구원은 본인이 원할 때만 구원이다. <플랜 75>가 보여준 그 얄팍한 안도감 뒤에서, 자신의 마지막 계절을 빼앗긴 채 방황할 수많은 이들의 고독을 본다. 가지를 움켜쥔 채 마른 잎으로 남으라는 강요 대신, 그들이 우아하게 낙하할 수 있는 정교한 대지를 마련해 주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는 진정한 문명사회의 얼굴이다.


나의 이 차가운 시선은 결국 나 자신을 향해 있다. 나 또한 언젠가 마주할 나의 겨울에, 누군가의 '선의'라는 이름 아래 내 마지막 결정을 빼앗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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