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녀의 동정과 노모의 죽이 부른 파멸
앞의 두 글에서 나는 한 가지를 반복해서 말했다. 사회는 '떠나려는 자'의 결정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불존중은 언제나 선의의 얼굴을 하고 있다. 영화는 감상주의로 포장하고, 사회는 보호라는 이름으로 문을 잠근다. 그런데 이 구조가 2026년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훨씬 오래전부터 이야기로 전해왔다.
우리는 모두 '선녀와 나무꾼'의 해피엔딩을 강요받으며 자랐다. 하지만 날개옷을 훔쳐 시작된 그 기만적인 관계의 끝이 정말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나는 이 설화의 이면에 숨겨진 지독한 오지랖과 그로 인한 파멸에 주목한다. 선의가 어떻게 한 인간의 마지막 출구를 봉쇄하는지, 이 이야기는 <플랜 75>보다 훨씬 솔직하게 보여준다.
날개옷을 되찾아 하늘로 떠난 선녀가 지상의 남편을 위해 백마를 보내준 대목을 보자. 이것은 <플랜 75>의 감독이 미치코에게 '사과나무 노래'를 선사하며 삶을 예찬하게 만든 것과 같은 얄팍한 휴머니즘이다.
선녀는 이미 자유를 찾았다. 남겨진 나무꾼이 식음을 전폐하고 우울증에 빠진 것은 그가 감당해야 할 선택의 결과값이다. 그런데 선녀는 어설픈 마음의 짐을 덜고자 백마를 보낸다. 이미 끝난 관계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치명적인 희망을 주입한 것이다. 갈무리가 필요한 인생에 억지 호흡기를 단 셈이다. 이 동정이 바로 비극의 서막이다.
압권은 노모의 등장이다. 아들이 하늘로 비상하려는 찰나, 노모는 '죽이라도 한 그릇 먹고 가라'며 앞길을 막아선다. 우리는 여기서 익숙한 얼굴을 본다. '그래도 살아야지', '어떻게 자식이 부모를 두고…', '신의 뜻이 아니다'라며 죽음의 문턱에서 소매를 붙잡는 사회적 가치관의 화신이다.
노모는 아들에게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왜 가려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지금 이 결정이 얼마나 오래 숙고된 것인지. 그녀의 개입에는 절차도, 경청도, 대안의 제시도 없다. 오직 자신의 불안을 달래기 위한 즉각적인 차단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나는 모든 개입을 폭력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결정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없이, 내 감정의 무게로 타인의 출구를 막아버리는 행위를 폭력이라 부르는 것이다.
노모의 '죽'은 지독하게 따뜻하고, 그래서 더 잔혹하다. 상대가 하늘(자유)로 가고자 하는 갈망보다, 내 눈앞에서 밥 한 그릇 먹는 안위가 더 중요한 오지랖. 결국 그 뜨거운 죽은 백마를 놀라게 했고, 나무꾼은 하늘로 갈 마지막 사다리를 걷어차였다.
선의는 때로 독보다 치명적이다. 상대가 어디로 가려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는 안중에도 없이 오직 '내가 주고 싶은 호의'에만 매몰된 배려가 한 인생을 어떻게 불살라 버리는지를 이 서사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늘로 갈 수 있다는 거대한 구원을 보았다가, 고작 죽 한 그릇 때문에 그 기회를 영영 박탈당한 인간이 마주할 감정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한 좌절이 아니라, 영원히 닫혀버린 감옥에 갇힌 공포다.
나무꾼의 결말은 그래서 '주체적 선택의 박탈'이 낳은 비극이다. 사회(노모)가 퇴로를 막아버렸을 때, 개인이 자신의 고통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하고도 비참한 방식만이 남는다. 만약 노모가 그를 묵묵히 보내주었더라면, 혹은 선녀가 애초에 어설픈 동정을 거두었더라면 나무꾼은 적어도 그런 방식으로 생을 마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전래동화의 해석이 아니다. 오늘의 이야기다. 퇴로를 빼앗긴 이들이 결국 어떤 방식으로 그 고통을 끝내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우리는 지금껏 나무꾼에게 죽을 먹이려는 노모를 '모성애'라 칭송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물어야 한다. 우리는 나무꾼에게 억지로 죽을 떠먹여 그의 날개를 꺾는 노모인가, 아니면 그가 백마를 타고 자신의 계절을 찾아 떠나게 두는 서늘하고도 품격 있는 관찰자인가?
<플랜 75>의 감독은 노모의 편에 섰다. 미치코의 입에 뜨거운 죽을 밀어 넣으며 그녀를 지상에 묶어두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백마가 소란 없이 하늘로 오르길 바란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인간에 대한 마지막 예의이자, 진정한 의미의 자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