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4
거래의 편의성 때문에 시작된 화폐
화폐가 상용되기 전 그리스는
생산품인 올리브와 작물의 씨앗, 그리고 음식에 사용하는 소금이나
옷을 만들 때 사용하는 비단이 물물교환의 주요수단이었다.
함께 사용된 것이 조개껍데기였다.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조개를 상장하는 ‘貝’와
비단을 상징하는 ‘幣’이 합쳐진 ‘화폐(貨幣)’라는 단어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화폐로 사용된 조개껍데기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에서 발견되는데
조개껍데기로 만든 목걸이 같은 장식품은 부의 상징이었다.
호박금(琥珀金) 또는 엘렉트럼(electrum)이라는 광물이 있다.
금과 은이 자연에서 합금된 것으로 은 함량이 20~70%까지 다양해
비율에 따라 백금색에서 황동색까지 여러 색을 띤다.
아시리아가 망하면서
4개의 국가로 갈라지는데 그중의 하나인 리디아 왕국은
아나톨리아 반도 전체를 확보하기도 했지만 주로 서쪽을 지배하던 나라였다.
팍톨루스(Pactolus)강과 광산에서는 호박금을 얻을 수 있었는데 이것을 이용해 주화를 만들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인류최초의 화폐를 만들어 사용한 것이다.
주화에는 왕의 상징인 사자의 얼굴이 찍혀있었는데
조개껍데기가 아닌 4.76g이라는 일정한 형태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도 자신이 지은 ‘역사’에서
리디아가 금과 은으로 만든 주화를 최초로 사용했다고 언급한다.
리디아의 마지막왕인 크로이소스는 금과 은을 분리해서 사용했다.
당시 부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던 그는 엄청난 부를 기반으로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로 인한 자만심이 과했던지 페르시아를 정복하려고 계획했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정복당한다.
이 때 리디아의 많은 부도 함께 넘어가게 되고 페르시아는 그 부를 기반으로 새로운 패권을 쥐게 된다.
페르시아를 지배하던 다리우스1세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금화를 만들었다.
다리우스의 이름을 따 다라야카(dārayaka)로 불린 금화는
5.4g으로 만들어졌고 세겔이라는 단위를 사용했다.
은화는 8g으로 만들어졌는데 드라크마라는 단위를 사용했다.
막강한 군사력으로 이집트와 소아시아를 정복했던 페르시아의 영향력으로
다리우스가 만든 주화는 곳곳에서 사용되었고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교역에 치중했던 그리스인들은
물물교환으로 인한 불편보다 금속으로 만든 화폐의 편의성을 깨닫게 된다.
과도기를 거쳐 구리를 녹여 주화형태로 만드는데
이게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동전’의 기원이 된다.
그리스가 만든 주화는
해상무역이 발달하면서 농업중심의 경제가
점차 상업중심으로 전환될 때 본격적으로 사용된다.
그리스의 주화의 사용은 식민도시가 확대되면서 공동 경제권을 이루게 되는데
흑해의 해안일대에서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쪽해안과
지금의 나폴리지역인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섬에 이르기까지 확대된다.
이런 공동 경제권의 형성은 그리스가 식량공급을 위해 교역을 하던 이집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해상교역으로 부를 이뤄가던 아테네는
아테네여신을 상징하는 부엉이를 새긴 은화를 사용했는데 품질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스의 현인 중의 한명인 솔론은 집정관이 된 이후 아테네의 개혁을 위해 경제를 활성화시키려고 했다.
그 중심에 해상무역을 두고 주변국가와의 교역을 증가시켜 경제를 일으키려고 했다.
당시 교역이 많던 곳은 페르시아 지역이었다.
그들과 편이성을 위해 어느새 교역의 기준이 되어버린 주화를 통일시키는 계획을 세운다.
그리스은화의 은 함유량을 낮춰 페르시아 은화와 동일하게 만든 것이다.
페르시아와 아테네의 은화는 동일한 가치를 가지게 되었고 둘의 교역에 보다 자유로워졌다.
경우가 좀 다르지만 ‘플라자 합의’와 비슷한 효과를 냈다.
상대적으로 아테네의 화폐가치 하락을 불러왔고 더 많은 양의 은화를 생산할 수 있었다.
다른 나라들과 교역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 아테네는
그리스의 식민도시들과 이집트와 교역에서 많은 돈을 벌게 되었고 아테네에는 부가 쌓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