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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립일세 Mar 21. 2022

대제국의 젖줄을 만든 종이

몽골이 만든 교초를 유럽에 전하다.

대제국의 젖줄을 만든 종이     






 1298년 즈음 

베네치아 출신의 한 남성이 

제노바에 포로로 잡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해상무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무역의 중심이었던 지중해라는 바다를 두고 수차례 마찰을 겪었다. 


결국 

쿠르촐라 전투(이:Battaglia di Curzola)가 

벌어지게 된다. 






 지금은 

‘이탈리아’라는 같은 나라지만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이탈리아의 통일운동)가 있기 전까지 

이탈리아는 각 지역의 패권자들에 의해 

분할통치 되고 있었다. 


서로의 이익이 우선이다 보니 

각 지역은 배려와 협업보다는 경쟁과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시기적으로 

베네치아 군인으로 참전한 그 남성은 

전쟁에서 패해 포로가 되어 

제노바에 갇히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포로로 잡힌 남성이 

감옥에서 만나 알고 지내던 시람 중에는 

루스띠껠로 다 피사(이탈리아어:Rustichello da Pisa)가 있었다. 


시인으로 활동하였던 그는 

1280년 전후로 소설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루스띠켈로와 그는 친해졌다. 


그는 자신이 멀리 중국에 있는 몽골까지 여행을 했었고 

긴 시간 여러 지역을 거치면서 겪었던 다양한 경험과 들었던 이야기들을 

루스띠껠로와 나눴다. 


루스티껠로는 

그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 






 시간이 지나 

루스티껠로는 그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모아 

글로 남겨 출판을 하게 된다. 


그 책의 제목은 

‘백만 가지 이야기(이:Il Milione, 프: Livres des merveilles du monde)’다. 


우리는 이 책을 

흔히 ‘동방견문록’이라고 부른다. 


루스띠껠로에게 

자신이 했던 경험을 이야기한 사람은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르코 폴로(Marco Polo, 이하 마르코)였다.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는 

당시만 해도 미지의 세계였던 동양에 대한 이해를 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이 책에서 언급된 ‘지팡구(Zipangu)’라는 명칭은 

훗날 재팬(Japan)이라는 명칭이 나오는 계기가 되기도 할 정도다. 


이 책에 실린 내용 중에는 

당시 중국을 지배하던 몽골의 경제에 대해서도 알려주는 내용이 있다. 


몽골은 

금속으로 만든 돈의 사용을 

금했다. 


대신 

거래에서 

종이로 만든 돈을 

사용하도록 했다. 


역사에서는 

이를 ‘교초(交鈔)’라고 

부른다. 






 드넓은 제국을 

경영해야 했던 몽골에게 

금속으로 만든 돈은 

굉장히 불편했을 수 있다. 


이런 불편은 

2017년 밀린 급여를 

100원짜리 동전과 10원짜리가 섞인 동전 4자루로 지급한 사례에서 

알 수 있는데 

이때 동전의 무게가 

총 50kg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드넓은 대륙을 다니는 상인들에게 물건 값을 치르기 위한 금속 돈은 

엄청난 부담이었을 것을 알 수 있다.






 금속돈과 종이돈을 병행 사용했던 이전의 나라들과는 다르게 

이동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몽골제국은 종이로 만든 돈만 사용하도록 했던 것이다. 


금속화폐의 사용이 일반적이었던 유럽인 입장에서는 

글자가 적힌 종이로 일상에서 사용하는 식량을 비롯한 생필품은 물론 

값비싼 진주, 보석처럼 귀중품까지 거래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몽골의 영향력아래 있었던 

많은 지역에서 교초를 사용하다보니 

고려에서도 

사용했었다고 알려져 있다.


 몽골의 

또 다른 세력이었던 

일한국에도 

영향을 주었다.


 짧았지만

 서아시아 최초의 종이돈으로 알려진 ‘챠브’가 

만들어 지기도 했었다.


 이런 몽골의 방식은 

동방견문록이외에도

 피렌체 상인이었던 프란체스코 발두치 페골로티(Francesco Balducci Pegolotti)가 

북아프리카, 아시아와의 교역을 위해 쓴 

‘Practica della mercatura(통상지남)’에서도 볼 수 있고 

이븐 바투타(Ibn Battuta)가 남긴 

‘리흘라(Rihla)’라는 여행기에서도 

교초와 관련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쿠빌라이 칸이 즉위하면서

 종이돈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교초를 받기 거부하거나 위조하면 

형벌을 주었다. 


교초는 광활한 지역에서 

거둬들인 몽골의 부가 유지되는데 기여하는 

중심축이었다.


 여러 지역의 정벌로 소요되는 

군사비지출을 비롯한 대제국을 경영하는데 들어가는 각종경비로 인해 

교초가 남발되어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몽골은 

소금 전매에 관여하면서 

교초를 소금과 태환이 되도록 하였다. 


소금으로 교초의 가치를 보전해주면서 

시장에서 교초가 증가하는 것에 대한 가치의 폭락을 막을 수 있었고 

한동안은 신용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유통방식은 

후대에 건국된 

명나라와 청나라까지 

영향을 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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