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가 아니라 세계에서 제일 컸던 도시
앙코르와트가 말해주는 크메르의 부(富)
인간이 만들었겠지만
인간이 만들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기적이라 불리는 건물들이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다.
그만큼 많은 자원과 인력이 동원되어
만들어진 것들을 우리는
‘Wonders of the World’라고 부른다.
그중에서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드러나 있는 건축물은 일찍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지만
울창한 밀림에 가려져
오랜 시간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있던 건축물도 있었다.
1850년 6월
가톨릭 신부 뷰오가 선교여행을 갔었는데
밀림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우연하게 발견하게 된 석조건축물을
사람들에게 알렸지만
모두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주목하지 않았다.
이때 신부의 주장을 들었던 사람중에는
프랑스의 자연학자, 박물학자이자 탐험가였던
앙리 무오(Henri Mouhot, 1826~1861, 이하 무오)도
있었다.
무오는
우연히 몽골제국 상인이던 주달관(周達觀)이
테무르 칸의 명령으로 작성한
40여 분야의 ‘진랍풍토기’를 통해서
진랍과 관련된 역사내용을
접하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몇 년 전에 뷰오 신부가 밀림 속 존재한다고 주장하던
건축물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모두가
허황되다고 말했지만
책을 읽은 무오는
신부가 말했던 것들이
모두 사실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몇 년 후
인도차이나반도를 찾은 무오는
신부와 역사책의 기록에 따라
밀림을 헤매며 건축물을 찾아다녔다.
결국
무오는
빽빽한 밀림이 오랜세월 감춰왔던
거대한 석조건축물들이
가득한 지역을 발견한다.
무오와 일행은
그 거대한 규모에 놀라게 된다.
앙코르와트가
잊혀져 전설속에서 전해지다가
인간의 역사 안에
다시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약 600여년의 세월동안
밀림에 숨겨져 있던
캄보디아의 유적지 앙코르와트를 구성하는
1200여 건축물은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무오는
수많은 건축물을 보고
일기에 ‘솔로몬의 신전에 버금가고
미켈란젤로와 같이 뛰어난 예술가가 세운 이것은
고대 그리스, 로마인이 세운 것보다 뛰어나다.’는
표현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앙코르와트의 석재 건축물 곳곳에는
유럽에 남겨진 고대 건축물의 부조들에 비해
훨씬 뛰어난 정교함이 남겨져 있다.
뛰어난 아름다움까지
갖추었다.
앙코르와트의 건축물에는
석조예술에서 보기 어려운 섬세함과
다른 문화권에서는 보기 어려운 독창성이 있으면서도
규모면에서 웅장하다.
어지간한 기술력과 경제력이 아니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규모다.
앙코르와트라는 석조건축물 하나로
이것을 남긴 이들이 가지고 있었을 문화와 기술,
그리고 경제적인 부(富)까지 엿볼 수 있다.
이런
거대한 예술품을 남긴 그들은
누구일까?
지금은
오랜 내전으로 낙후되었고
바다마저 없는 내륙국가로 축소되었지만
역사에서 우리는
그들을 ‘크메르 족’이라 불렀다.
인도네시아 자바를 중심으로 세워졌던
해상왕국인 샤일렌드라 왕조에 의해 식민 지배를 받았지만
힘을 키워 독립한
‘자야바르만 2세’가
802년에 나라를 세웠다.
이들은
1431년 타이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약 600여 년간 나라를 유지하면서
주변을 통합해 나갔다.
자야바르만 2세 이후
후대 왕들은 영토가 넓히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덕분에 베트남, 라오스, 타이, 미얀마는 물론
중국의 남부일대까지 영향력을 끼치던
거대한 제국(Khmer Empire, 크메르제국)을 이룰 수 있었다.
당대의 유럽의 또 다른 제국이던
비잔틴과 비슷한 크기의 영토를 가졌었다.
영토의 확장은
경작지와 인구의 증가를 의미했다.
크메르제국에서 살기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증가하는 인구는 노동력이 늘어난 것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위기 시에는 나라를 지키는 군사력을 의미하기도 했다.
평상시에는 관개수로와 저수지를 만들고
농업에 힘썼다.
고온다습한 기후로 인해
1년 3모작이 가능했다.
덕분에
군사들이 먹을 식량은
항상 충분했다.
주변에 대한 정복전쟁과 함께
인도와 중국남부 지역에서의 무역활동도 활발했다.
경제의 풍요는
주변과 무역으로 인한 교류를 포함해
문화교류까지 이어지게 했다.
크메르제국의 수도였던
‘앙코르 톰’의 인구가 당시에
100만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1300년 당시
유럽에서 부유했던
피렌체와 베네치아, 밀라노의 인구가
대략 10만 명 안팎이었고
가장 컸던 파리가
20만 명을 육박했었다는 기록을 비교했을 때
크메르제국과
앙코르 톰이 가졌을 부(富)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문명권의 구분을 떠나
도시화가 진행되고
많은 수의 인구가 거주하기 위해서는
식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유럽도 그랬고
크메르제국도 그랬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먹거리를 공급해야하기 때문이다.
도시의 발달 못지않게
도시주변의 농경이
활발해야하는 이유다.
고온다습한 기후 덕분에 가능했던 3모작은
도시의 사는 사람들에게
먹거리 제공과 잉여의 부를 만들어냈다.
이는
외부로의 무역을 통해
또 다른 부가가치를 창출했고
외부의 문화를 받아들여
예술문화가 발전하는데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기술자를 불러
통치자들의 치적을 기릴 건축물을 만드는데도 기여했다.
갑작스레 약해져
1430년 타이 아유타야의 침공으로
1431년에 망하기 전까지
크메르제국은
인도차이나반도에서
가장 고도화된 선도문명을 가진 민족이었고
세계사에서도 뒤지지않을 대제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