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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립일세 Mar 28. 2022

측우기에 담긴 여민정신(與民思想)

뜻이 없기에 길이 없을 뿐 뜻이 있다면 길은 있는 것이다. 

측우기에 담긴 여민정신(與民思想)  





   

 세계 부(富)의 

쏠림현상과 기울어진 운동장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쏠림과 운동장의 기울기는 

언제 가장 크게 발생할까? 


바로 

전쟁이나 전염병, 자연재해 같은 

위기상황 때다. 


위기는 

항상 우리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평상시에는 

영향을 주지 않지만 

우리가 방심하는 사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와 

큰 쏠림과 더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어버린다. 






 오늘날 생산과 소비를 기초로 

산업이라는 것이 전 세계로 세분화되기 이전 

인류는 오로지 먹거리를 충당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다. 


이를 위해 

노동력을 확보하고 농사지을 땅을 차지하거나 

목축지를 확보하기 위해 

전쟁은 계속되었다. 


먹거리를 확보는 

어떤 나라나 무리든 그 구성원들 못지않게 

그들을 이끌던 권세가에게도 무척 중요했다.

안정된 사회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나라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세금을 거두어야했는데 

지금과 같은 화폐경제가 아니다보니 

쌀이나 포목으로 세금을 내고 있었다. 


평년이나 풍년이 들어 

모두가 먹고 사는데 평안할 때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가뭄이나 홍수로 농사가 흉년이 들면 

문제가 생겼다. 


먹고사는게 힘들다보니 

먹거리를 구걸해야했기 때문이다. 


자연재해로 인해 발생한 

흉년과 같은 환경이 발생하면서 

같은 손실액이 발생하더라도 소득이 많은 계층보다는 

소득이 적은 계층일수록 

손실의 ‘비율’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위기가 계속될수록 

사람들은 노비와 머슴을 자처했다. 






 동서를 막론하고 

사회구성원간의 부와 재화 같은 물질적인 격차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손실의 비율이 큰 없는 자들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있는 자들을 위해 일해야 했다.

 

이런 불평등한 상황을 줄여보고자 

솔론은 금권정치를 하였고 

광해군은 조세를 개혁하여 대동법을 시행하고자 하였었다. 


물론 

기득권자들의 

반발을 불러왔을 거라는 것은 뻔하다. 


그럼에도 

이런 노력을 했던 

또 한명의 성군이 있었다. 


우리는 

그를 ‘세종대왕’이라고 

부른다.  






 세종의 이들이었던 문종이 

세자시절 장영실과 함께 만든 ‘측우기(測雨器)’는 

우리가 아는 대로 

비가 오는 것을 측정하는 것이었다. 


지금과 같은 장비로 

비의 양을 측정할 수 없던 시절 

비가 온 뒤 땅을 파서 

물이 스며든 정도를 확인해서 

비가 온 양을 측정하였다. 


토질과 지형에 따라 

물이 스며드는 정도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굉장히 불확실한 방법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나선이가 바로 세종의 세자였던 

문종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빗물을 받아 비의 양을 측정하기 위해 

비슷한 모양의 도구가 사용되었기에 

조선에서 만든 측우기가 강우량을 측정하는 세계 최초의 도구는 아니지만 

국가단위에서 

기상 관측을 위해 만든 

세계최초의 표준화된 기구였다는 것은 맞다. 


다만 

만든 이유가 

단순하지만은 않다. 


비를 예측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발생한 현상인데 

그 양을 왜 측정해야했을까?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지만 

지금까지의 정황상으로 보면 

조세와 연관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1440년부터 시작된 제작은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1442년 측우기가 도입된다. 


새롭게 만들어진 제도에 따라 

측우기는 전국에 있는 고을에 설치되었고 

비가 올 때마다 기록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는 

임진왜란 직전까지 

계속 되어졌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전란을 겪으면서 

측우기와 관측 보고 됐던 자료도 

대부분 사라진다. 


영조는 

측우기를 복원하면서 

예전처럼 전국의 거의 대부분의 고을에 설치하기보다는 

한성의 궁과 

팔도 감영소재지, 강화와 개성의 유수부에만 설치하여 

1907년 통감부의 기상관측이 시작될 때까지 

약 140여 년간 한성과 전국의 유량을 계속 기록하고 

보고하도록 한다.






 측우기로 

전국 비의 양을 알게 된 조선 정부는 

1444년부터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이라는 

조세부과 기준을 적용한다.

 

비가 온 양에 따라 

농사가 풍년일 수도, 평년일 수도, 흉년일 수도 

있다. 


나라에서는 풍년일 때 조세를 좀 더 걷고 

흉년일 때는 좀 덜 걷도록 했다. 


자연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다보니 

측우기로 측정된 비의 양도 조세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조세가 

백성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 지 잘 알고 있었던 세종은 

측정된 빗물의 양을 감안하여 

농사의 풍, 평, 흉을 예상하고 

백성에게 적용할 세율을 조정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부의 개입으로 쏠리고 

기울어져버린 운동장의 기울기를 줄여보고자 했던 

조선조정의 노력은 

이후에도 

기득권세력이었던 사대부와 유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시도된다. 






 백성의 공정을 

위했던 마음으로 만들어진 측우기는 

그래서 단순한 측량도구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 작금의 현실에서 

굉장히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결국에는 

구성원들 대부분의 살림살이가 나아져야 

국가도 부강해지는 것이다. 


전염병이라는 위기가 찾아오면서 

이로 인해 커져만 가는 국민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새롭게 들어설 정부는 

여러 가지 조세를 조절하여 쏠림과 기울어진 운동장의 기울기가 줄어들도록 

적극적인 개입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국민을 부자로 만들고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어가는 시

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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