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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립일세 Mar 30. 2022

은-지정은제

흥하는 요인은 망하는 요인이 된다.

청나라의 조세제도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선을 도왔던 명(明)나라의 국력이 약해지자

명의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치세가 기울어진 틈을 타고

해안에서는 왜구가 기승을 부렸고

만주에서는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이

후금을 세우고 새롭게 일어났다.


지방에서 벌어지는

반란을 진압하느라 정신이 없던 명나라는

이런 변화에 대한 대응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자성이 일으킨 반란으로

북경은 함락당하였고

명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만주지역에서

세력을 키운 후금이

나라이름을 청(淸)으로 고치고

이런 혼란을 틈 타

북경을 함락시킨다.


청은

강남지역에서 항거하던 남명(南明)을 제압하고

대만까지 정벌한다.


주변의 불안요소를

모두 제압한 청나라는

본격적인 안정기를 맞게 되는데

그 정점에는

강희제(康熙帝)가 있었다.


옹정제와 건륭제에 이르기까지

134년의 안정된 치세와 성장은

오늘날 중국이 한족만의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강희제의 노력으로

강남에 있던 번국들마저 완전히 제압하자

번국에서 들어오는 조세로 인해

청의 국고는 풍족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재정적인 안정은

청나라의 치세에 살던 한족들의 안정된 삶에

기여했다.


강희제는 나라를 다스리는데

더 이상의 세금은

백성들에게 부담만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즉위한지 50년을 기념하는 1711년에

더 이상의 정세(丁稅)를 추가로 걷지 않기로 한다.


세금의 동결을 선언한 것이었다.


유례없는 이 세금 감면정책을

‘성세자생인정(盛世滋生人丁)’이라고 한다.


1711년까지의 인구기준으로

인두세를 걷다보니

역대 중국 왕조에서 조세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두세(人頭稅)는 동결되었고

1712년생부터는 사람으로 인한 조세의 부담은 줄어들었다.


그동안 조세를 피하기 위해

조사에서 빠졌던 사람들도 등록되었고

세 부담이 줄자

출산에 대한 부담이 적어 많은 수의 아이가 태어나며

인구의 증가속도가 폭발적으로 빨라졌다.


당시만 하더라도

식량공급에 있어 농업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모든 것을 사람이 하던 시절에

농사에는 노동력이 필요했다.


늘어난 인구는

노동력을 제공하였고

식량생산량도

급증하게 된다.


이런 영향들로 인해

명나라가 망했던 당시에 1억 명이 안 되던 인구는

안정된 치세동안 계속 증가하여

1850년대에는 4억 명대로 끌어올리는데 역할을 하게 된다.






정세는 고정되었지만

정세 대상이었던 농민이 도망가는 경우가 발생했다.

정세가 줄어들자 이를 보완하기 위해 강희제는

기존의 지세에 약간의 정세를 부과하는 방법을 통해 지세에 정세를 합쳐

지정은제(地丁銀制)를 시행하게 된다.


이 제도는 강희제때

광둥(廣東, 광동)을 시작으로

쓰촨(四川, 사천), 저장(浙江, 절강), 허난(河南, 하남)에서 시험적으로 시행하며

제도를 보완하는 시간을 가졌고

옹정제때

전국으로 확대한다.


지세에 정세가 붙다보니

땅을 많이 가진 부자들은 내야하는 세금이 계속 유지되거나 증가했지만

땅이 별로 없던 백성들이 내야 되는 세금은

많이 줄어들었다.


이런 문제로

지정은제에 대한 지역지주들의 계속된 반대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청나라의 재정을 담당하는 중요한 조세제도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은을 활용한 조세가

확대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은이 명에 이어 청에서도

외부로부터 지속적으로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신대륙에서 채굴된 은은

유럽으로 흘러갔고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아시아로 진출한 유럽의 무역선들은

향신료를 비롯한 차, 면직물, 도자기 같은 동양의 재화를 실어가기 위해

너도나도 은을 싣고 몰려들었다.


또 유럽보다

명이나 청에서 은의 가치를 더욱 높게 인정했기 때문에

더 많은 재화를 얻어갈 수 있어 무역거래에서도 유럽상인들에게 유리했다.


이로인해 당시 유럽 상인들은

고대그리스와 페르시아의 거래에서 페르시아상인들이 그랬던 경우처럼

‘은거래’의 차익까지 얻을 수 있었다.


단지 문제는

중국에서 유럽의 물건을 필요로 하지 않다보니

유럽의 상인들은 중국에 팔 물건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거래가

지속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무역불균형을 초래했고

유럽중에서도 중국과의 교역량이 많던

잉글랜드에서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정도였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유럽의 상인들은 은을 주고 명·청의 재화를 구입할 뿐

은을 다시 가져올 방법은 없었다.


당시

전 세계에서 거래되던 은의

25~34%가 청나라로 유입이 되었는데

유입된 은은 중국을 빠져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청나라의 조세에

은이 사용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이런 영향으로

명나라의 일조편법에 이어

청나라에서는

지정은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은의 유통 덕분에

중국의 상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재화를 거래하는

시장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모든 거래에서

주요수단이 되어버린

은(銀)은

청나라 시장경제의 중흥을 가져왔다.

 

은에 의지하게 되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훗날 아편으로 인한

은의 유출은 청의 쇠락에

직격탄이 되었다.


백성들은

은으로 과세를 하던 지정은제로 인해

세금을 납부하려면 은을 구입해야했는데

아편으로 인해 은이 유출되면서

시중에 은이 부족해졌다.


은을 사려는 사람들로 인해

은의 수요는 유지되었지만

공급이 줄자 은값은 치솟게 되고

물가의 하락으로 인해 대외무역에서 보는 손실이 커지면서

청나라의 부담으로 작동했고 시장경제가 무너지는

단초가 되었다.






아편으로 은이 유출되자

갈등도 시간이 갈수록 깊어져갔다.


이로 인해 발생한

아편전쟁은 청이 종이호랑이였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각종이권을 얻기위해

청의 각 지역에서 무력시위를 이어갔다.


청을 흥하게했던 은이 줄어들면서

그렇게 청은 서서히 힘을 잃게 된다.  






시장의 이런 혼란은

청의 경제에 혼란을 이어지게 되고

결국 1911년에 발생한

신하이거밍(辛亥革命, 신해혁명)으로 인해

지정은제를 유지하던 청나라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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