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삼으로 거상이 된 인물

계영배를 곁에 두었던 주인공

by 필립일세

홍삼이 만든 거상(巨商)의 출현






(1779년(정조 3)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었다. 그의 증조부 때부터 의주에 터를 잡고 살았다. 그의 할아버지 때 상업에 종사하면서 아버지인 임봉핵(林鳳翮)도 상업에 종사하며 북경을 오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상업에 눈을 뜨게 된 소년은 부친으로부터 중국어도 조금 배웠다. 어린 나이에 상단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일을 배운다. 그리고 훗날 조선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냈던 상인이 된다. 그의 이름은 임상옥(林尙沃)이다.






당시 왜(倭)와의 무역을 담당했던 동래왜관과 함께 청나라와의 교역은 의주를 통해서만 다닐 수 있었다. 조선에서 청, 왜와 교역하면서 가장 많은 인기를 구가했던 것은 단연 홍삼이었다. 특히 중국에서는 백삼보다는 홍삼에 대한 인기기 높았다. 홍삼은 포기할 수 없는 재화의 샘물이었다. 이에 정조는 홍삼 무역을 공식화한 ‘포삼제(包蔘制)’를 1797년(정조21)에 실시하고 역관과 경상(한성상인)이 조선내의 ‘인삼전매권’과 ‘홍삼무역권’을 갖도록 했다.






청나라를 오가던 역관들을 통해 홍삼의 인기를 알고 있던 조선의 조정은 한강변에 증포소를 설치한다. 한성에서 만들어지는 홍삼을 거래하는 과정에서 의주를 거쳐야했기 때문에 의주의 만상(灣商, 의주상인을 부르던 호칭. 의주를 용만(龍灣)으로 불렀던 데에서 유래)과 힘든 일은 담당하던 의주의 군관에게도 홍삼무역권이 주어졌다. 홍삼의 인기를 알게 되자 개성의 송상과 만상은 자본을 투입해서 인삼을 직접 재배하고 홍삼을 만들어 밀무역까지 하게 된다.






1810년(순조10)에 한성의 증포소 위치를 개성으로 옮기면서 홍삼 무역은 급속히 성장하였다. 포삼제를 실시하던 초기에 홍삼 수출량은 120근이었지만 50여 년이 지난 1851년(철종 2)에는 수출량이 4만 근까지 증가했다. 역관들의 삶을 위해 시작된 포삼제로 홍삼은 만상의 최고 상품이 되었고 송상은 홍삼을 만드는 생산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포삼세로 국가 재정을 채우는데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조정에서는 포삼제로 거둔 세금이 약 20만 냥이었다. 만상과 송상은 추가로 홍삼을 몰래 만들어 밀무역을 감행하기도 했다.






1796년(정조20) 임상옥은 이런 상황에서 상단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이후 순조의 외삼촌이었던 박종경의 마음을 얻어 포삼무역을 10년간 독점하게 된다. 만상이 독점하게 된 홍삼무역권을 임상옥이 독점하면서 모든 교역은 임상옥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이후 임상옥은 30대에 만상의 우두머리에 올랐다. 임상옥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만 70여명이었다.






청나라를 오가는 사신일행 100여명이 올 때마다 각자 따로 상을 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청나라의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찾아온 평양감사와 의주부윤의 일행 700여명이 한 번에 먹고 쉬게 할 수 있는 공간을 갖출 정도로 재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재력의 뒷받침은 홍삼이었기에 임상옥이 홍삼무역으로 얻은 부(富)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청나라와 홍삼 무역규모가 커진 것은 홍삼의 뛰어난 품질과 효능을 꼽을 수 있다. 거기에 청나라에 퍼져있던 아편을 해독하는데 조선의 홍삼이 효과가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홍삼의 거래량은 폭증했다. 청나라에서 찾는 사람이 많은 만큼 높은 이윤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의 상인들은 조선홍삼을 확보하기 위해 밀무역도 서슴치 않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평소 어려운 사람들에게 널리 인심을 쓰던 임상옥의 자선사업이 알려지면서 주변의 천거를 받아 1832년 곽산군수가 된다. 임상옥이 이룬 부(富)가 거대했지만 사대부의 나라 조선에서 사농공상의 최하위 계층이었기에 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의주에서 발생한 홍수로 인해 많은 이재민이 발생하자 이들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하며 도운 것이 조정으로 알려져 1834년 구성부사(종3품)에 임명되지만 상인에게 너무 높은 직책이라는 비변사의 반대에 부딪치자 스스로 사직하며 관직에서 물러난다. 더 이상의 관직과 부(富)에 대한 욕심이 없어 1855년(철종 6)에 사망할 때까지 술과 시를 지으며 여생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상옥이 이룬 부의 크기는 거대했지만 오늘날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그의 이름이 사람들 사이에서 오르내리며 후세에 기려지고 있는 이유는 요즘으로 치면 재벌의 부를 뛰어넘는 부를 가졌음에도 자신이 모은 재산을 자선에 쓰면서 사람을 우선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의 집에는 상인도 넘쳐났지만 과객 또한 넘쳤다. 그들을 허투루 대하지 않았다. 가뭄이나 홍수로 흉년이 들어 걸인이 넘치면 이런 빈민을 구제하는데 앞장섰다. 시대적인 상황과 별도로 개인주의가 팽배한 오늘날의 재벌에게서는 볼 수 없는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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