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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립일세 Nov 04. 2022

소주(燒酒) 요약

간략한 소주 이야기

소주(燒酎)요약






 태종은 새롭게 책봉한 세자 충녕대군의 정치적인 입지를 세워주기 위해 재빠르게 움직인다. 상왕으로 물러나며 세자를 임금으로 앉힌 것이다. 명과의 요동문제를 매듭지었고 대마도를 정벌하면서 남해안일대에 피해를 주던 왜구의 문제도 결했다. 내치까지 안정되면서 세종 때부터는 유교국가로서의 조선의 색깔을 본격적으로 내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내치에 좀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 있었던 세종은 장영실을 기용해 각종 기구를 만들었고 역법을 만들어 농사에 도움이 되도록 역법과 측우기 등 다양한 발명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농사직설’을 편찬하기도 했다. 당시의 농서 대부분은 중국의 것을 가져다쓰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우리현실에 맞는 논밭갈이에 대한 내용은 물론 종자를 선택하는 방법과 저장법에 대해 기술되었다. 기장·조·수수, 메밀, 피는 물론 삼(麻)과 벼, 보리, 밀, 녹두, 콩, 팥, 참깨 등의 파종법과 경작에 대한 내용과 농작물의 재배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담았다. 이런 노력과 발명은 물론 개간으로 농지까지 증가하면서 세종대에 농업 생산량이 본격적으로 증가하였고 인구의 증가로 노동력가지 상승하였다. 이런 환경은 시간이 지나면서 민가에서도 곡식으로 술을 빚을 정도의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만들었다.






 농업의 성장으로 먹고사는 것에 상대적으로 여유로워지자 백성들은 곡식을 술을 자주 빚어 마신 것으로 보인다. 실록에서는 이런 환경을 신하들이 우려하여 세종에게 금주령을 내려야한다고 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세종은 신하들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주문을 내리는 것으로 마무리했던 내용에서 당시 술을 만들어 마시는 게 얼마나 보편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성종 대에 이르러 많은 백성들이 탁·청주는 물론 소주를 만들어 마시는 게 일상인 것을 막기 위해 금주령을 내려야한다고 왕에게 청하는 장면은 조선 전기사회의가 내치적인 안정은 물론 풍요까지 누리면서 술을 빚는 기술 보급이 얼마나 잘 되어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불교의 세력을 꺾기위해 폐찰을 통해 사찰의 수를 줄여갔듯이 유교를 성장시키고 신진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조선에서는 서원과 향교를 세우는 것을 장려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조세를 경감해주기도 하여 서원은 지방 유림들과의 관계를 맺으며 많은 성장을 이루게 된다. 서원에서는 유교(학)성인들에 대한 제사가 끊이지 않았는데 이때에 항상 술을 빚어 사용하였다.





 

 특히 위계질서를 중요시하며 조상과의 관계성을 중요시 여기던 한 사대부의 집안에서는 조상신에 대한 제사문화가 유난히 강했다. 이런 이유들로 유교의 성장은 당연히 술의 성장과 같이 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조선에서는 농업의 생산성증가와 더불어 부유층들의 소주를 만들어먹는 경우가 증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각 지역별로 소주를 상징하는 명칭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소주는 그릇에 술을 넣고 불에 구워서 만들어내기 때문에 ‘굽는다.’는 의미의 ‘소(燒)’가 명칭에 사용되거나 소주를 만들 때 사용하는 도구인 소주고리에서 맑고 투명한 술이 이슬처럼 흘러내린다 해서 이슬을 상징하는 ‘로(露)’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소주를 상징하는 명칭에 이런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대표적으로 평양의 감홍로, 진도의 홍로, 한성의 삼해 소주가 있고 약재를 넣어서 달인다는 의미의 고(膏)를 넣은 죽력고 등이 소주에 사용되던 명칭이다. 특히 지초로 붉은 색을 냈던 홍로에 꿀을 넣어 달달한 맛을 느낄 수 있었던 감홍로는 판소리 중 하나인 수궁가에서 거북이가토끼를 속이는 과정에서 감홍로로 유혹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 춘향가에서도 감홍로를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소주가 백성들에게 친근하면서도 마시고 싶어 하는 음료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 조선에서 소주가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반증이다.






 이후 소주는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시대를 맞으면서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된다. 신식소주라고 불리는 이른바 주정을 수입하여 만들어진 술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가격까지 저렴하게 판매되면서 많은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소줏고리로 만드는 값비싼 증류식소주에 비해 향은 달랐지만 색이나 맛은 비슷했기에 신식소주의 성장은 증류식소주의 쇠락을 의미했다. 이후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신식소주의 본격적인 생산이 이루어졌다. 1919년 평양에 설립되었던 소주공장은 한반도는 물론 만주까지 소주를 수출하였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직접 증류해서 마시던 소주가 가격이 저렴한 신식소주(희석소주)로 대체되었고 이를 통해 증류식 소주의 소비는 점점 줄어들었다. 이후 침략전쟁에 활용할 목적으로 제주도에 주정공장을 생산하면서 우리나라 소주의 역사에 큰 지점을 만든다. 이당시 일본은 통치의 통합은 이루었지만 경제적 통합만은 진행하지 않았다. 경제적 수탈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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