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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는 깨달음도 얻고 돈도 벌었다

고려시대 승려는 성찰보다 술빚고 물건을 팔던 상업의 선구자였다.

by 필립일세

고려시대 사찰의 상업 활동과 술





혼란스러운 후삼국을 통일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고려는 불교를 기반으로 하는 나라였다. 대승불교의 이념을 추구하던 고려사회에서 사찰이 갖는 의미는 상당히 컸다. 개인의 성찰에 집중하는 소승불교보다 많은 중생을 구제하는 게 목표였던 대승불교에서는 많은 이들이 참배해야할 불상의 존재가 중요했다. 불상이 있을 공간도 중요했다. 불상을 놓을 공간이 만들어지면서 그곳을 관리해야할 승려가 필요했고 승려들이 모이자 이들 사이의 체계가 만들어지고 이들이 거주할 공간이 만들어졌다. 자연스럽게 주변시설이 조성되면서 사찰의 규모도 커지게 된다. 정신적으로 왕을 비롯한 왕족과 귀족, 백성에 이르기까지 대승불교의 영향을 받다보니 이들이 자신들의 안녕을 위해 사찰에 바치는 재화의 양도 적지 않았다. 국가에서도 불교사찰이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는 것에 대해 특별한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과 귀족들의 경우에는 사원전을 하사하거나 노비를 주어 이들의 재산이 증가하는데 도움을 주기까지 한다.






막대한 토지와 노비는 농업의 생산력이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흉년이 들었을 때에도 먹을 것이 부족하던 일반 백성들과는 달리 사찰은 약간의 어려움은 있었지만 일반 백성들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이런 때 사찰이 먹을 것이 부족하던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면서 고리대를 놓는 등 영리 행위가 과도한 경우가 늘었다. 이런 영리 행위가 늘어날수록 사찰은 더 많은 토지를 사들일 수 있는 재정적인 능력도 확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고리대를 갚지 못한 경우에는 농사짓던 땅을 백성들에게서 빼앗기도 했다. 특히 흉년이 계속되는 경우에는 먹을 것을 구하려는 백성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사찰은 이들에게서 더 많은 땅을 빼앗을 수 있었다. 사찰의 재산이 증가하면서 그 영향력은 지방의 호족에 못지 않았다.1)






사찰이 소유한 토지는 면세 혜택은 물론이고 요역(徭役)의무까지 없다 보니 이런 혜택을 노리고 사원에 토지를 시납(施納, 사찰에 금품이나 토지를 바치는 것)하고 승려로 살아가는 백성도 있었다. 사찰은 이런 환경을 활용하여 상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사원전(寺院田)에서 생산하는 각종 채소와 곡식은 물론, 가축, 꿀, 소금 등을 내다 팔았다. 이런 상업 활동의 또 다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주조업이다. 고려의 개국 초기인 983년(성종 2)에 6개소의 주점이 설치된다. 술을 일반 백성에게 판매하였다.3) 이는 사회적인 문제를 불러왔다. 국교로서의 정신적인 지주의 역할을 해야 할 불교가 상업활동을 하면서 백성들에게 술을 만들어 판다는 것은, 역으로 비난을 받는 대상으로 전락한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010(현종 1)년에는 사찰에서의 주조를 하지 못하도록 규제조치가 내려지지만 사찰에서는 주조가 꾸준히 진행되었다.4) 이는 사찰이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다. 조정이 규제하거나 통제하는 것을 따르지 않아도 처벌받지 않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진 특권이 아니다. 승려들이 술을 마시고 문제를 일으키자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승려들이 사찰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금지시켰고 그다음에도 재차 비슷한 조치와 함께 술을 만들지 못하도록 규제를 취하지만 이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어 사회적인 문란을 일으켰다. 당시 사찰이 가졌던 힘의 크기를 알게 해준다.5)






여기에 소비되는 쌀의 양도 엄청났다. 경기도 양주의 3개의 사찰(장의사(庄義寺), 삼천사(三川寺), 청연사(靑淵寺))에서 승려들이 금령을 어기고 주조를 하면서 사용한 쌀의 양이 360여 석이었다는 기록이 나온다.2) 이를 현재로 기준하면 1석은 쌀 2가마니로 1가마니를 80kg으로 계산하면 160kg이 된다. 시기적인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1석을 150~200kg이라고 보았을 때 약 54,000~72,000kg의 쌀을 사용한 셈이다. 이를 쌀과 물의 양을 1:1로 맞춰서 술을 빚었다고 가정하면 86,400~115,200 리터의 술을 빚었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이는 오늘날 5천만 인구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적지 않은 양이다.






이러한 양조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당시 고려의 화폐정책과 사찰에 시납된 쌀이 있었다. 오랜 시간 저장하기 힘든 쌀의 특성상 음식을 만들어서 팔아야 했다. 쌀로 만들 수 있는 음식 중에서 가장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음식이 바로 술이었다. 쌀의 경우 미강유가 상온에서 산소와 결합하면서 산화반응을 일으키면 쌀에 있는 단백질이 변질되면서 특유의 묵은내가 날 수 있다. 이런 현상을 막고 좀 더 오래 보관을 하려면 적정조건(15℃내외, 습도70%내외, 산소5~7%)에서 보관해야 하지만 그런 조건을 당시에는 맞추기 어렵다 보니 보관을 위해 선택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만들어진 술과 음식을 팔기 위해 나라에서 운영하던 음식점과 주점을 통하기도 했지만 각 지방에 있던 주, 현에 상점을 열어 백성들에게 판매를 했다.7) 이 과정에서 고려조정이 철과 은으로 화폐를 만들어 사용을 장려하고 있다 보니 화폐의 사용이 활성화되면서 상거래가 활기를 띠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8)9)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사찰은 물론 승려들이 교리에 어긋나는 물품의 거래가 증가하고 이를 통해 남기는 이익이 과도해지자 충숙왕에 이르러서는 이들의 상거래를 금지시키는 조치가 이뤄지기도 한다.10) 현실이 이렇다 보니 사찰에 대한 인식이 모두에게 좋게 보기는 시간이 갈수록 어려웠다.






이들의 주조는 누룩을 기반으로 시작되었다. 곡식으로 술을 빚기 위해 특성상 당화를 해주어야했는데 이때 사용된 것이 바로 누룩이었다. 주로 밀로 만들었던 누룩은 수확한 밀을 거칠게 빻아서 만들었다. 누룩의 효소는 쌀을 큰 단위의 전분구조에서 작은 단위의 단당이나 이당, 삼당의 구조로 분해하는 역할을 해서 효모가 이를 먹이로 하여 알코올을 생성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런 누룩을 사찰에서는 조정의 규제와 통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만들어서 일반 백성에게 팔았다. 금주령이 강력했던 영조시대에는 누룩이 눈에 잘 보이지 않도록 하고 감추기 좋게 하려고 크기의 변화를 주었지만 누룩의 제조를 멈추지는 않았다. 사찰에서 누룩의 제조가 멈추게 된 시기는 일제의 제재가 가해지는 조선 말엽에 가서야 급격하게 감소한다.






몽골의 침입 이후 오랜 기간 혼란을 겪은 고려의 백성들은 화친을 통해 혼란이 어느 정도 잦아들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힘든 시기를 겪었던 정신적 피로를 멀리하고 안정을 찾기 위해 사찰을 찾았다. 사찰에는 이들이 자신의 신앙심을 증명하기 위해 내는 시주를 포함한 시납을 보관하기 위해 창고를 지어야했다. 승려들은 또다시 음식을 만들고 술을 만들었지만 몽골의 침입과 함께 새롭게 전해진 증류라는 기술을 활용하여 기존과는 전혀 다른 술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 기술을 활용해 더 비싼 가격에 거래되었던 증류주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몽골의 간섭기 동안 고려에 퍼진 증류법은 사찰에게는 더 없이 좋은 아이템이었을 것이다. 저장성이 좋은 술도 여름 같은 높은 온도에 오랜 시간 노출되면 술맛이 변하여 사람들의 손길이 가지 않는다. 그런데 증류를 하면 아무리 높은 온도에 노출되어도 술의 품질에는 변화가 거의 없었다. 증류로 만든 술의 이런 특성을 잘 살려서 당시의 조상들은 온도에 쉽게 변했던 발효주와 섞는 획기적인 주조기술을 개발하게 된다. 바로 봄에 만든 술이 여름을 보내도 술맛의 변화가 거 없다고 알려진 과하주다. 여름(夏)을 지난다(過)는 의미의 과하주(過夏酒)말이다.






지금까지 기술한 바와 같이 대승불교에서 사원의 중요성으로 인해 사원에 대한 국가적 통제가 쉽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 사원은 왕실과 조정의 비호아래 양민에 대한 고리대 행위가 계속 이어진 것은 물론 주조 등의 상업 활동을 통해 재정의 규모가 확대되었고 반대로 국가의 재정은 상대적으로 축소되었다. 국가의 계속되는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사원은 술을 만들어 팔면서 사회적인 비난에 당면했다. 특히 몽골의 간섭기 이후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대립과정에서 사찰은 권문세족과 함께 신진사대부들의 개혁의 대상으로 부각되었다. 국가의 재정이 어렵던 상황에서도 자신들만의 부(富)를 추구하던 권문세족과 사찰은 백성들의 지탄을 받는 상황에 이르면서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을 맞게 된다. 사찰로 지나치게 쏠리게 된 경제구조의 폐해는 고려 말의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혼란과 사회구조적인 문제까지 겹치면서 고려의 붕괴를 재촉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때 왕부터 백성까지 고려인의 정신적인 버팀목이었던 불교는 비난의 대상이 되어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새롭게 정계에 진출한 고려 말기의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숭유억불론(崇儒億佛論)을 일으키게 된다.






결국 민심이 이반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개창되면서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에 따른 불교의 탄압은 새로운 시대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사찰에서 발전했던 술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종교로서의 본질을 잊고 상업적 이익을 위해 누룩을 만들고 시납된 쌀로 술을 빚어 판매했던 사찰은 결국 주조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고 상업 활동에 제약이 생기면서 그 위세가 점점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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