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의 재정을 담당했던 성전기사단
유럽의 역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사건이 있다. 중세의 성격을 규정 짓는 가톨릭에 의해 일어난 십자군 전쟁이다. 유럽의 종교와 정치, 사회, 문화는 물론 경제와 금융이 변하는 데 영향을 끼친다. 성전기사단(聖殿騎士團, 라: Templarii, 프: Ordre du Temple; Templiers, 잉: Knights Templar)은 십자군 전쟁 기간 활동했던 기사단 중에서 제일 많은 활동을 하다 보니 높은 명성을 얻었다. 성전기사단은 1118년 예루살렘을 수호한다는 하기 위해 프랑스 출신의 8명의 기사가 솔로몬의 성전에 모여 설립된다. 그래서 ‘성전(聖戰)’이 아닌 ‘성전(聖殿)’기사단으로 불린다. 예루살렘을 수호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창립된 수도회다 보니 기본적으로 전투 능력을 갖춘 기사가 중심이 되었다. 기사로 구성된 최초의 수도회이자 가장 강한 수도회였다.
베르나르의 노력으로 1129년 트루아 공의회에서 성전기사단이 교회의 공식 승인받는다. 동시에 교회의 지원까지 받게 되면서 가톨릭 교인들의 지지도 받게 된다. 이를 계기로 가톨릭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에서 성전기사단에게 막대한 기부가 이어졌다. 그들의 돈, 땅은 물론 그들이 하는 사업의 지분이 기부되면서 사업을 통해 얻는 이익까지 기부되었다. 이후 교황의 칙서를 통해 성전기사단은 가톨릭의 영향력이 미치는 모든 나라의 국경을 자유롭게 다니닐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다니면서 내야하는 통행세 등의 세금으로부터도 자유로웠다. 세속의 법에 대한 복종의 의무도 없애 주었다. 기사단이 교황을 제외한 모든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것이다.
성전기사단도 수도회기는 했지만 1차적 임무는 군사적인 임무였다. 그럼에도 기사단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기사의 수는 적었다. 기사단의 구성원 다수는 기사들의 활동을 돕고 재정을 관리하거나 다른 십자군 등을 지원하는 업무를 했다. 기사와 수도사들은 개개인이 청빈을 맹세하지만 기사단은 기부를 받은 재산의 범위를 넘어서는 부(富)를 관리해야 했다. 십자군에 참여하려는 귀족 중에서 자신의 부재중에 재산을 관리해줄 것을 성전기사단에게 당부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그만큼 성전기사단에 대한 가톨릭 신도들의 신뢰도는 높았다.
이들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얻는 수수료와 기부받은 재산을 관리하면서 얻은 이익이 늘어나면서 성전기사단의 부의 크기는 점차 커졌다. 여기에 새로운 방법이 추가되면서 성전기사단의 이익을 늘리게 된다. 바로 신용장(또는 증명서)이다.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이 오랜 시간 여행하면서 도적으로 인해 귀중품이나 여행경비를 빼앗기는 피해를 방지하는 차원에서 성전기사단은 이들에게 신용장(또는 증명서)을 발행하기 시작한다. 이는 유럽 전역에 1천여 개에 가까운 지부(또는) 출장소가 거미줄처럼 짜여 있었기에 가능했다. 신용장은 성지순례에 나서려는 사람들이 출발하기 전에 자기가 사는 지역의 성전기사단에 자신이 가진 귀중품이나 돈을 맡기고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증서를 발급받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목적지에 도착하거나 중간에 돈이 필요할 때 이를 현지에서 사용되는 재화나 화폐로 교환하여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얼핏 들어도 오늘날의 수표(手票)와 같은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역사가에 따라 성전기사단의 이런 신용장을 최초의 은행업이라고 규정하는 학자도 있다.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인해 성지순례에 나서는 사람들의 재산은 안전할 수 있었고 성전기사단은 수수료를 챙길 수 있었다. 또 이런 경험들이 쌓여 훗날 은행이 생기는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성전기사단은 이런 사업을 통해 얻은 이익으로 가톨릭 세계에 금융이라는 시스템을 만들었고 유럽은 물론 새로 얻은 중동의 토지에 광활한 농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의 농장에서는 곡식과 과일이 생산되었고 유럽과 중동을 오가는 배편으로 공급되어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해군력까지 유지했던 성전기사단은 지중해 해상교역의 안전에도 기여를 했다. 부(富)를 기반으로 하는 이런 자금력과 전투력으로 키프로스를 소유하기도 했던 성전기사단은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의 계략에 의해 기사단이 해체될 때까지 유럽 전역에 영향력을 끼치며 중세유럽이 경제적으로 활기찰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1307년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5세(아비뇽 교황)의 승인도 없이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성전기사단의 주요 인물 100여 명을 체포해서 고리대금업과 동성애, 이단 등의 죄를 물어 처형했다. 이들의 자백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갖은 고문을 가했기에 가능했던 자백이었다. 필리프 4세는 프랑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다른 지역의 성전기사단의 해체를 교황에게 요구했다. 당시 프랑스 왕의 영향력으로 교황이 된 클레멘스 5세는 이런 압력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없었다. 교황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채 결국 1312년 템플라 기사단의 해체시킨다. 유럽에서 금융업이 보다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는 그렇게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