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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립일세 Jun 21. 2023

고대 로마의 최고 부자였던 멍청이

고대 로마의 최고 부자였던 멍청이     






 세스테르티우스(Sestertius)는 고대 로마에서 사용하던 화폐단위 중 하나다. 세스테르티우스의 가치를 얼마였다고 딱히 정할 수는 없지만 1세스테르티우스의 추정 가치를 역사학자에 따라 1~100달러라고 주장하면서 편차가 크다 보니 이를 두고 논쟁이 가끔 벌어지기도 한다. 환산 기준을 어디(금, 은, 소비재화)에 두냐에 따라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데 오늘 풀어갈 이야기에서는 이 단위가 약간의 영향을 준다. 2008년 포브스(Forbes)에서 역사상 부자였던 사람 75명의 순위를 정하면서 이 수치가 논란이 되었다. 논란의 주인공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 BC 115년경 ~ AD 53년, 이하 크라수스)로 당시 기사에 그의 재산을 1,698억 달러(현재 가치)로 추정해 인류 역사에서 역대 부자 8위로 매겨졌었다. 






 그는고대 로마의 역사에서 역대급 부자 중의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면서 로마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활약한 인물이지만 그가 부(富)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여러 수법 때문에 ‘악랄한 졸부’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만큼 돈에 대해 강한 집착이 있어 부유함을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가 소유했던 재산은 팽창기의 로마가 사용하는 1년 예산과 맞먹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Publius Licinius Crassus, 푸불리우스)는 로마의 정복 전쟁에서 활약한 전쟁 영웅으로 명망이 높았고 원로원의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집정관까지 선출될 정도로 정계의 유력 인사였다. 로마가 내전으로 인해 민중파였던 가이우스 마리우스 일파와 귀족파였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대립할 때 푸블리우스는 술라 편을 들어 마리우스 일파에게 살해된다. 누렸던 권력만큼이나 재산이 상당했던 푸불리우스는 아들에게 물려줄 재산이 상당했다. 그럼에도 아버지처럼 암살위험이 더 컸기에 재산보다 신변의 안전을 위해 숙청의 위험이 더 컸기에 크라수스는 히스파니아 지역으로 몸을 피한다. 이후 술라의 휘하로 들어가 마리우스 일파와의 대결에서 공을 세우며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마리우스 일파를 모두 제압한 뒤 로마로 돌아와 자신이 원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어야 했던 재산권을 인정받으며 로마의 상류층에 복귀하며 자신의 재능(?)을 발휘한다. 






 유산으로 받은 재산이 많았으면서도 그는 만족을 몰랐다. 술라의 정치적 영향력과 물려받은 재산을 기반으로 상류층과 어울리면서 그는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고 재산을 늘렸다. 변방의 여러 정복 전쟁에 지원을 하면서 군공에 숟가락을 얹었고 전리품으로 얻은 노예와 토지를 얻어 라티품티움(Latifundium, 대농장)을 소유했다. 특히 히스파니에서 돌아와 당당히 로마 정계에 입문하여 정적들을 제거하는데 활약했다.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을 이용해 제거된 정적들의 몰수된 재산을 중간에서 강탈하며 더 많은 재산을 불렸다. 여기까지는 고대 로마의 상류층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암투에서 흔하게 있는 내용들이기에 어느 정도 감안할 수 있다. 






 문제는 일반 평민에게 했던 악랄한 짓이다. 크라수스는 자비를 들여 소방대를 조직했다. 그렇다보니 공익적인 목적보다는 사익을 추구하는 소방대였다. 불이 났을 때 불을 꺼 달라고 미리 비용을 지불한 집이 화재를 당했을 때 출동해서 불을 꺼줬다. 불이 난 집에는 비싸게 돈을 받고 불을 꺼줬다. 그렇지 않을 때는 불이 커져 모든 게 잿더미가 되더라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 타버린 집 앞에서 망연자실한 주인에게 원래의 가격 이하로 집을 구매해서 자기 재산으로 새롭게 지은 뒤 자신이 원하는 가격에 세를 놓거나 팔아서 이윤을 남겼다. 이런 행동이 반복되자 사람들은 불이 난 집을 그에게 팔지 않는 때도 있었지만 집을 새로 짓기 위해 돈을 빌려야 했기에 그에게 결국 손을 내밀 수 없었다. 이때 크라수스는 돈을 빌려주고 비싼 이자를 받아 배를 불렸다. 이런 사례가 있다 보니 화재를 일부러 발생시켰다는 의심까지 받았다. 






 이런 고리대금업은 물론 은광도 소유했다. 은광과 농장에서는 일할 노예가 필요했기에 자연스럽게 노예교역에도 참여해 이윤을 남겼다. 여기에서 크라수스는 더 높은 가격에 노예를 팔기 위해 차별점을 만들었다. 교육을 통해 재능있는 노예를 만든 것이다. 글을 가르쳐 책을 읽어 주게 하거나 요리를 가르치기도 했고 수리를 가르쳐 재산관리를 할 수 있는 재능을 길러주었다. 단순 노동이 아닌 수행할 수 있는 업무능력이 높아져 부가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노예를 양성하면서 보다 높은 가격에 노예를 교역할 수 있어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돈에 집착을 보인 이유는 돈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정치다.






 그는 이렇게 모은 돈을 많은 관리들에게 뇌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정적으로부터 몰수한 주택과 토지는 물론이고 정복 전쟁에서 획득한 노예와 토지는 물론 은광 같은 곳의 우선권을 가질 수 있었다. 어찌 보면 크라수스가 돈이 돈을 낳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의 선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로마의 장군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발생한 스파르타쿠스(검투사) 반란을 진압하게 된다. 여기에서 전공을 세운 그는 서서히 권력에대한 욕심을 드러낸다. 






 권력에 욕심이 많았던 그는 권력의 정점에 올라 사람들의 추앙을 받기를 원했다. 그의 이런 노력은 결국 결실을 보게 된다. 그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이하 카이사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Gnaeus Pompeius Magnus, 이하 폼페이우스)와 함께 제1차 삼두정치의 한 축으로 로마의 한 시절을 풍미하며 로마를 나눠 통치하였고 이끌었다. 그러나 재력에 비해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에게 군공이 밀렸던 것이 항상 결핍 요인이었다. 이로 인해 생긴 콤플렉스는 크라수스에게 공명심을 향한 과도한 욕구를 불러왔다.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크라수스는 자신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치적을 만들기 위해 무리수를 두게 한다. 바로 파르티아(지금의 이란) 원정이다. 이 원정에서 고대 로마 역사상 최대의 패전으로 알려져있는 ‘카레 전투’가 치러진다. 4만 4천여 병력으로 출발한 원정은 1만여 명이 겨우 돌아올 정도로 처참한 패배를 당한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무리한 전투를 계속하다가 파르티아군에게 패배하였고 자신의 목숨은 물론 아들과 로마 군단을 잃으며 스스로 몰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때 입은 피해로 인해 로마는 더 이상의 동진은 포기하고 파르티아로부터 시리아를 지켜낸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는 살면서 했던 행동은 많은 이들에게 교훈을 남겼다. 부(富)는 이루었지만 평판을 이룰 수는 없었다. 부(富)를 활용해 권력은 얻었지만 군공까지 얻을 수는 없었다. 주체할 수 없던 욕구는 결국 과도한 욕심을 일으켜 자멸을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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