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필름 카메라부터 새로 산 필름 카메라까지
나의 첫 필름 카메라 - 그러니까 내 두 눈으로 처음 응시했던 - 는 아버지의 필름 카메라였다. 이 카메라는 짙은 파란색의 멋진 가방도 따로 있던 친구였는데, 아버지가 미처 잠가두지 못했던 20만 킬로미터를 우리 가족과 함께 달렸던 프린스에 얌전히 누워있다가 전문 도범의 눈에 띄어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 자리를 빌려 나의 성장과 함께 한 우리 가족의 카메라를 무상 갈취한 도범의 대대손손 사랑 없는 삶을 바라며, 잘 가라 삼성 카메라여.
아버지에게는 사진을 업으로 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사진가가 담는 피사체는 주로 자연에서 낳은 것들이었는데, 눈을 잔뜩 받치고 서있는 나무라던가 그림 같은 산수라던가 굽이치는 강물 같은 자연환경이었다. 커다란 카메라를 이고 지고,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사진을 담던 그 사진가는 사진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친구가 나를 찍은 사진들은 분명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인데 한 사진에 내가 둘이기도 했고, 아버지가 둘이기도 했다. 카메라를 신체의 일부처럼 쓰던 그는 잔재주가 놀라웠다. 마치 골초인 사람이 연기를 입으로 들이마셨다가 다시 연기를 뱉으며 콧구멍으로 넣어버리는 잔재주를 가진 자처럼. 비유가 이상한데, 아무튼. 나는
내가 왜 둘이야?
쌍둥이었는데, 한 명은.... 크흡
아버지의 열연에 중학교 2학년 질풍노도의 시기에 일주일 정도 되는 시간 동안 나의 잃어버린 쌍둥이 동생의 존재에 애달아하기도 했었다.
유유상종이라 그랬는지 아버지도 그 사진가 친구처럼 사진 찍기를 즐겨했다. 어린 시절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친구의 어린 시절 앨범을 가끔 볼 수 있었는데, 그 어떤 집도 우리 집만큼 사진앨범이 많지 않았다. 침을 흘리며 제대로 걷지 못하던, 콧물이나 질질 흘려 소매를 코로 적시던 시절의 내 사진들은 책장 한 줄을 메울 수 있는 정도였다. 아버지가 제일 사랑한 피사체는 나와 엄마였다. 그리고 넘치는 사진앨범을 볼 때마다 새삼스레 깨닫는 사실은 역시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미니멀하지 못하고 맥시멀이 된 이유는 유전과 후천적 배움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삼성 필름 카메라와 아픈 이별을 하고 성인이 된 내가 만난 세상에는 DSLR이라는 카메라가 있었다. 실은 내가 성인이 되기 전부터 500 만화 소니 300 만화 소니 하는 작은 소형 카메라도 생겼고, 그런 카메라가 없어도 휴대폰으로 간단히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됐다. 세상은 기술을 숨기고 있었던 것인지, 기술을 뒤늦게 개발하게 된 것인지 어린 나로선 알 수 없었지만 찍는 순간 찍은 사진을 볼 수 있다는 기술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100장 공들여 찍어 제일 잘 나온 사진을 남기는 아주 효율적인 사진의 세계가 펼쳐졌으니, 필름 카메라는 사람들에게서 잊히는 듯했다.
디지털 사진 시장이 커지자 사진관들은 포토샵으로 눈을 키우고 피부를 보정하고 얼굴을 줄여주는 스튜디오 사진관으로 전업을 하거나, 시대에 따라가지 못해 실물 그대로 담긴 사진을 인화해주는 사진관들은 실제 본인의 얼굴이 아닌 손예진과 현빈의 얼굴을 바라는 뻔뻔한 손님들에게 버림받았고, 문을 닫기 시작했다.
한편 대학에 입학 한 나는 불꽃 신방 - 모든 손가락과 발가락을 오므려 숨기고 싶어 지는 그 이름 - 이라며 열정을 불태우는 학우들과 함께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대학 내에는 학회라는 것이 존재해서 학회에 가입하지 않으면 대학교 생활 내내 아웃사이더를 자처하게 될 것 같은 불안감에 나는 벌벌 떨며 어떤 학회를 붙잡아 들어가게 된다. 내 인생의 필름 사진과 필름 카메라의 역사를 쓰고 있는 이 글의 흐름으로 봐서는 내가 선택한 학회의 이름이 보도사진연구회, 였으면 좋았겠지만 그 당시 나의 꿈은 밥 벌어먹기 힘들어도 고 마인드로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거창한 꿈을 안고 있었으므로 진실의 소리 - 이 또한 두 손발 눈감아..- 방송 연구회에 들어갔다.
이 시기 대학생활은 참으로 암담했다. 학교에서 배웠던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는 대학생들에게 역삼각 구조로 발현되었고 나도 그 역삼각의 매슬로우 욕구 5단계가 적용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1학년 때 자아실현의 욕구가 강했으나 2학년이 되었을 때는 1학년들에게 선배로 존경받고 싶었던 욕구가 강했고, 3학년이 되었을 때는 학회 그까짓 것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화의 욕구가 강해 무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4학년이 되어서야 먹고사는 문제가 절실해졌다. 졸업하고는 그냥 생리적 욕구에 충실한 똥 싸는 기계로 전락하게 된다.
남은 것 하나 없는 대학생활이었다. 술이나 먹고 똥을 쌌으며, 현재에 집중 못하고 미래에 대한 걱정만 가득이고 지고 앉아 나라 잃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한심하고 한심하다. 마치 야구로 치면 9회 말 투아웃 만루 상황에 나타난 타자인데 삼진으로 물러나는 운명 같았고, 실은 그라운드는 무슨 선발도 못서는 벤치 인원이었으며, 실은 그도 아니고 1년 내내 야구장에 출석하며 선수들을 욕하는 투수 뒤 관중석에 앉아있는 50대 중년의 아저씨 같았다. 뱀술을 가져와 외국인 관중에게 한 잔 권하는 뭐 그런 느낌. 그렇게 별 볼 일 없는 어른이 되어갔다.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꿈은 고사하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바빠 내게 꿈이라는 것은 잘 때 꾸고 아침에 일어나 해몽이나 검색하는 그런 존재가 되었다.
그렇게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사회에 무의미하게 산소를 마시고 탄소를 뿜는 기후위기에도 일조하는 인물로 크다가 좋은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됐다. 별 볼 일 없는 사람 둘이 만나 하는 사랑은 무의미하지 않았고 나 또한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사랑이라는 힘은 위대해서 나는 더 이상 똥 만드는 기계 같지 않았고, 쉽게 비관하지 않게 됐고, 내일이 기대되는 오늘이었고, 별게 다 의미 있어지는 삶을 만들어줬다.
내가 사랑하는 그는 호구 같은 기질이 있지만 돈 나가는 구멍에는 오히려 똘똘이 스머프 같은 기질이 있다. 호구인 줄 알았던 그에게 직장동료가 다가와 당근 마켓 거래를 제안했다. 물건은 필름 카메라. 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긴 시간 검색을 끝낸 그는 합리적인 가격이라며 쿨하게 거래를 승인하였다. 실제로 30만 원 정도에 거래되고 있는 필름 카메라였고, 그는 단 돈 10만 원에 구매했다. 그 카메라가 내 인생의 두 번째 필름 카메라 미놀타 X-700이다. 우리는 우리의 필름 카메라는 처음이었기에 낯을 참 많이 가렸다. 근데 또 뚜껑을 열어보니 정작 낯을 가린 건 내가 아니라 카메라였는데..
분명 그에게 카메라를 판 친구는 필름이 이미 있다고 했는데, 필름을 맡기러 간 사진관에서 필름이 없다며
이 멍청이들은 뭐야
라는 눈빛으로 - 실제 그의 마음과 상관없는 나의 해석임을 밝힌다 - 우리를 쳐다봤다. 머쓱해진 우리는 참 재밌는 에피소드 하나 생겼네. 호호. 웃고 넘겼으나 다음에는 열심히 대만에서 찍은 - 대만씩이나! -사진 두 롤이 모두 찍힌 사진이 없다는 통보를 받는다. 이 멍청이들은 뭐야 라는 눈빛을 더 이상 받고 싶지도 않고, 나 그렇게 멍청이 아니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으므로 그 사진관은 다시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냥 다시 가기 부끄러웠다.
세 번째 필름은 우리에게 멍청하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새로운 사진관 사장님의 도움으로 제대로 필름을 끼워 넣었고, 마침내 나의 사진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그 사진관은 나의 단골 사진관이 된다. 이름은 부산의 몇 없는 필름 인화 사진관 토픽 칼라.
미놀타 X-700은 보급형 필름 카메라로 유명한데, 색감이 무척 예뻤다. 아래는 그 증거로 담는 미놀타 X-700으로 남긴 사진들.
미놀타 X-700 필름 카메라를 집에 들인 지 2년쯤 되었을 때, 사진이 너무 예쁘게 나와서 결과물이 무척 훌륭하고 흡족한 반면 무게감 때문에 여행을 떠나기 전 날 내게 근심을 안겨줬다. 애인과 함께 떠나는 여행에서는 그나마 짬 시킬 수 있다는 확실한 예감으로 무조건 챙겼지만 혼자 떠나는 여행에서는 좀 더 가볍고 싶은 마음. 그래서 나는 미놀타 X-700을 두고 다른 카메라를 구매한다.
내 인생 세 번째 필름 카메라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블로그와 브런치, 유튜브까지 필름 카메라를 검색하면서 깨달은 것인데 나는 너무도 미놀타의 색감에 익숙해졌다는 것. 별다른 보정을 하지 않아도 - 귀찮기도 하고 - 내가 원하는 딱 이 색감을 만들고 싶은 마음에 미놀타 기종을 알아봤고, 그동안 알아본 고생과는 다르게 내가 즐겨 찾던 필름 카메라 판매 사이트에 올라온 미놀타 오토 보이를 스치듯 고민하고 구매했다. 바로 미놀타 capios 75. 미놀타 카 피오스 75는 x700과 달리 사진을 찍고 필름을 감지 않아도 되고 처음 필름을 장착할 때도 그리고 다 찍은 필름을 뺄 때도 큰 노력을 하지 않아도 간편했다. 기특한 자동 소년(오토 보이) 녀석. 코 쓱. 거기다가 가볍기까지.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사진의 색감이 x700보다 쨍쨍하다는 점. (아래 capios 75 결과물)
내가 산 카메라들의 공통점은 첫째, 미놀타라는 점. 둘째, 타이머 기능이 가능하다는 점. 요 두 가지가 있는데, 실은 미놀타 x700은 방법을 몰라서 한 번도 찍은 적이 없었다. 수동 필름 카메라기 때문에 설정 또한 수동인데, 나의 게으름은 검색이 불가했으며, 나의 멍청함은 설명의 이해가 불가했다. 결국 제일 빠르고 쉬운 선택인 포기라는 걸 했는데, capios75의 경우 버튼 하나만 눌러두면 십 초 후 번쩍번쩍 우르르 쾅, 찰칵해주기 때문에 애인과 나 둘이 제3의 인물 없이도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아래는 그 결과물)
가볍고 타이머 기능도 되고 자동으로 필름을 감아주는 이 미놀타 카 피오스 75가 내게 와주어 나는 너무 기뻤는데, 미놀타 카 피오스 75 친구는 나와 마음이 같지 않았던 모양인지 한 번은 내 손을 피해 도주를 시도했다. 실은 내가 부주의한 탓에 떨어뜨린 것이지만. 뭐 아무튼. 그 일로 카메라 상단의 아주 작은 LED창이 흑빛으로 살짝 물들었는데 그 부분은 남은 필름의 양을 나타내 주는 부분이어서 나는 사진을 찍는 순간마다 마지막 한 장이 언제쯤 도래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게 됐다. 찰칵, 아직 또 남았다고? 찰칵, 아직? 지금 마지막은 아니겠지? 찰칵, 위이이잉. 마지막 사진을 마지막 사진으로 인지하지 못하니 필름을 미리미리 사두지 않으면 여행 도중 필름이 없는 상황도 생겼다. 애인이 남편이 되어 처음 떠난 신혼여행 때 그 일이 발생하고야 말았으니 나는 카피오스75에게 가진 사랑이 조금은 식어 자연스레 권태로워지고 말았다.
그래서 엊그제 나는 새로운 카메라를 구입하게 되었다. 돈을 벌기 위한 고민은 매일 힘들게 하면서 소비에 대한 고민은 내 뇌를 가볍게 스치니 나의 결심과 다짐이 얼마나 가볍고 버리기 쉬운 존재인지 새삼 깨닫는다. 이번에 나와 함께할 친구도 미놀타이고, 오토보이다. (자동 소년 사랑해.) 기종은 Minolta Zoom 130C라는 조금 더 기능을 넣은 느낌을 가졌고, 외관은 기존의 것과 비슷하나 아이폰의 렌즈가 하나에서 네 개로 인덕션 렌즈를 단 것처럼 앞에 렌즈 같은 것이 많이 있다. 필름 카메라 주제에 세기말의 혼돈을 지나 새천년에 만들어진 카메라라고 하니 좀 더 현대물을 먹은듯하다.
새로 산 필름 카메라의 택배박스를 뜯기 전 나는 고민해봤다. 나는 왜 필름 카메라가, 필름 사진이 좋은 걸까. 필름을 찍는 순간에는 필름 사진이 전혀 궁금하지 않고 기다린 적도 없던 주제에 필름을 사진관에 맡기는 순간부터 메일함을 계속 새로고침하는 나같이 성미가 급한 사람에게 필름은 지난 계절을 느리게 선물 받을 수 있어서 좋아요와 같은 낭만적인 이유로 좋아할 리 없다. 그저 사진의 질감, 어쩔 도리가 없는 순간의 기록이 좋다. 지우지도 수정하지도 못하게 남은 그 순간이 너무 좋고, 필름 카메라를 손에 쥐고 다니는 멋도 내겐 좋다. 가끔 엽서 쓸 때 모나미같이 똥 나오는 펜이 아니라 만년필을 들고 편지를 쓰는 것처럼, 매일 드는 가방 말고 결혼식엔 조금 비싼 가방을 메는 것처럼, 손톱 깎는 일이야 뚝딱 해낼 수 있는 일이지만 굳이 네일숍을 찾아 언니 아닌 동생에게 언니라고 부르며 하하 호호하며 내 두 손을 맡기는 일처럼. 아이폰으로 뚝딱 사진 찍어 인스타에 올릴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 현상하고 스캔된 필름 사진이 좋을 때가 있고, 필름에 담긴 내 시간은 아이폰에 담긴 내 시간보다 자주 내 곁에 머무르고 들춰진다. 그 들춰지는 순간이 좋아서 좋아한다. 정의 내리고 나의 필름 카메라를 기록하고 나니 더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