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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음 May 01. 2024

J에게


나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해. 지금처럼 끊임없이 시도하고 좌절하고 나면 나는 25m 레인만으로도 숨을 허덕이는 수력을 가지고 태평양 해협을 건너려고 했구나 싶어져. 그동안의 시도가 너무 운 좋게 성공적이어서 나 자신을 과대평가했나 봐. 나는 늘어지고 싶어. 자꾸만 소파에 얼굴을 처박고 미미의 고로롱대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고 싶어.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도 자꾸만 지쳐서 봤던 영화를 또 보고, 봤던 드라마를 다시 틀어 두곤 해. 빨리 식사를 마치고 얼음 가득한 커피를 마시고 싶어. 아무거나 입에 넣고 의무적으로 씹어 넘겨. 그래야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마실 수 있으니까. 빈속을 채울 때는 순서가 필요하니까. 해야 할 일을 미룰 때가 오면 그제야 머리가 팽 팽 잘 돌아가는 느낌이야. 책을 읽어도 아무 감상도 남기지 않고 작가가 떠먹여 주는 대로 받아먹고 싶어. 나는 이런 소모적인 시간을 보내고 싶어. 어떤 시도도 계획도 하고 싶지 않아.


인생에는 적절한 인풋과 아웃풋이 공존해야 한다고 하는데 인풋도 아웃풋도 없는 아름다운 삶은 없을까. 예전에 내가 했던 말 생각 나? 월급을 벌기 위해 소비를 해야 하는 일들을 보고 있노라면 노동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했던 말. 버는 돈이 그대로 나가버리는 데 가만히 있으면 더 낫지 않을까 하고. 너는 월세는 누가 낼 거냐고 했던가. 각종 공과금과 보험금, 우리가 후원하던 아이에게 갈 돈은 어떻게 낼 거냐고 했던가. 아니면 내 말이 맞는다고 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네. 아무튼 내게 흘러오는 인풋도 내게서 흘러갈 아웃풋도 잠시 중단한 채 있고 싶어. 우리 뭔가 하기로 했던 것이 많지 않았어? 내 눈도 쳐다보지 않은 채 묻는 너에게 내가 대답했지. J. 가끔 이렇게 시간을 죽여버리는 시간도 필요해.


김보라 영화감독의 책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이라는 제목처럼 내게 지금은 분명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거야. 그런 믿음이 나에게 있어.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 이따금 말에서 내려 자신이 달려온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고 한다. 말을 쉬게 하려는 것도, 자신이 쉬려는 것도 아니었다. 행여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 봐 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려주는 배려였다. 그리고 영혼이 곁에 왔다 싶으면 그제야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죽은 왕녀의 파반느> 소설에 나오는 어느 잠언집의 한 구절이야. 그래도 너에게 내 모습이 게으르고 무의미해 보일까? J. 나의 이 시간을 믿든 믿지 않든 가만히 멈춰서서 나의 영혼이 내 곁에 오기를 함께 기다려줘. 초조해하지 말고 불안해하지 말고 자꾸 앞서려는 마음을 무시하자.




이마음. 좋은 책을 보면 선물하고 싶은 사람이 생각나지만 그 마음을 꾹 참고 책을 팝니다. 치앙마이 바느질을 배워 로브와 자켓을 만들고 구멍난 옷들을 고쳐 씁니다. (재봉틀은 무서워서 두 번 만져보고 포기했어요.)  자기애가 넘쳐서 내가 쓴 글을 자주 읽고 내가 만든 영상을 다시 보고 내 사진을 오래 들여다 봅니다. 필름사진을 좋아해요. 수영을 좋아해서 최근 카톡 프로필을 연락안될 때 ‘책 속 아니면 물 속’이라고 바꿔두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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