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사물에게 배우는 글쓰기
진짜 인생의 맛은 때론 쌉싸름하다. 그래서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나는 원래 녹차를 마시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수족냉증이면서 속이 차다는 이유다.
따뜻한 차를 마셔도, 도톰한 양말이나 장갑으로 감쌌어도 손끝 발끝이 얼음장 같다.
나름대로 건강을 위한답시고 커피만 마셨다.
웃기지 않은가.
그러던 내가 녹차를 좋아하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어느 날, 친구가 정성스럽게 우려낸 녹차 한 잔을 내밀며 말했다.
“얼마 전에 아는 지인이 준 녹차인데. 맛이 좋아. 한 번 마셔볼래?”
망설이던 나에게 친구는
“녹차는 우려내는 사람 마음에 따라 맛이 달라진대. 아마도 내 마음이 따뜻해서인지 맛이 좋은 것 같아.”
하며 멋쩍게 웃는다.
그 말이 이상하게 닫혔던 마음을 빼꼼히 열게 하였다.
그렇게 말한 친구의 말도 마음도 예뻐서.
예의상 한 모금 마셨다가 그날 이후로 녹차에 빠져버렸다.
향은 부드럽고 끝 맛은 쌉싸름한 것이 어딘가 모르게 사람 같았다.
녹차는 같은 밭에서 자라더라도 종류에 따라 향도 맛도 천차만별이다.
햇빛을 얼마나 받았는지, 잎을 언제 땄는지, 어떤 방식으로 찻잎을 쪘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차가 된다. 더 신기한 건, 같은 차 잎으로도 누가, 어떻게 우려내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손 끝의 온기, 물의 온도, 기다림의 시간. 그 모든 것들이 차의 향미를 결정짓는다.
사람도 그렇다.
같은 땅에서 나고 자라며, 같은 집에서 성장하고, 같은 학교를 다니고, 비슷한 환경을 거쳐도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 외모만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 슬픔을 견디는 자세, 일을 받아들이는 태도, 기쁨을 표현하는 언어까지 모두 다르다. 우리는 종종 그 다름을 설명할 길이 없어 고개를 갸웃하지만, 어쩌면 그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같은 밭에서 자란 찻잎이 전혀 다른 차가 되듯, 사람 역시 경험이라는 뜨거운 물에 우려 지며 각자의 색과 향을 만들어간다.
글쓰기 또한 마찬가지다.
같은 주제를 두고도 어떤 이는 단단한 문장을 쓰고, 어떤 이는 부드럽고 유려한 문장을 쓴다. 같은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그 조합과 리듬, 문장의 숨결이 저마다 다르다. 그리고 그 차이는 살아온 시간, 마음속 온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동자의 방향이 글을 우려내는 방식에 고스란히 스며 있다.
매력은 그런 다름에서 비롯된다.
모든 녹차가 같은 맛이라면 우리는 금세 지루함을 느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한다면 세상은 재미없고 더딘 속도로 굴러갈 테고, 모든 글이 같은 결을 지녔다면 우리는 한두 권의 책만으로도 독서를 끝마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다.
매일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른 글을 읽으며, 새로운 차를 맛보는 이유는 그 다양함이 주는 풍요로움 때문이다.
나는 때때로 사람을 만날 때, 글을 쓸 때, 찻잎을 다루는 마음으로 다가가려 한다. 서두르지 않고, 먼저 내 마음의 물을 데우고, 그 사람과 문장이 어떤 온도에서 가장 빛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본다. 그렇게 한다면 예상하지 못했던 향이 피어오르리라.
우리는 모두 같은 땅에서 자란 찻잎일지 모른다. 그러나 살아가는 방식, 말하는 온도, 사랑하는 방식, 그리고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 서로의 눈을 마주하는 태도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 그 다름이 우리를 더 깊고, 더 향기롭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녹차처럼 쌉싸름한 글을 쓰고 싶다.
겉보기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한 모금 마셨을 때 문득 마음에 오래 남는 맛.
한 사람의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 진심이 느껴지는 글.
가끔은 쌉싸름해도 좋다.
그게 진짜 인생 맛일 테니까.
그 맛마저 멋지게 즐기면 되니까.
그런 쌉싸래한 녹차같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자세히 알아야 한다.
나를 들여다보는 세 가지 방법은 이렇다.
첫째, 감정의 미세한 결을 기록해 보자.
하루에 있었던 일보다 그 일에 대해 느낀 감정을 솔직히 적어보는 것이다. 화남, 슬픔, 부끄러움, 억울함, 조용한 기쁨… 이러한 감정들이 글을 우려내는 내 마음을 표현하는 온도가 된다.
둘째, 반복되는 생각을 메모해 보자.
머릿속을 자주 맴도는 말이나 문장,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무의식이 나에게 보내는 신호다. 그 신호를 글로 옮기면 마치 차를 천천히 우리는 것처럼 내면의 진심이 우러난다.
셋째, 나만의 언어로 이야기해 보자.
유려한 표현보다는 내가 진짜로 사용하는 말투와 단어로 글을 써 본다. 무심코 흘려 쓴 일기장 같은 글이야말로 가장 진한 향을 남긴다. 글은 결국 나를 담는 그릇이다.
글쓰기는 나를 들여다보는 가장 단순하고 깊은 방법이다.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내 안을 향해 글을 써나갈 때 비로소 나도 몰랐던 내 마음의 결이 드러난다.
그렇게 써 내려간 문장은 언젠가 누군가에게 따뜻한 한 잔의 녹차처럼 남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를 한 잔 우려내듯 글을 쓴다.
쌉싸름하되, 따뜻하게.
“너무 높은 것만 보고 살지 말자.
위, 아래가 아닌 앞, 뒤를 보고 살자. 네가 살아온 것, 그리고 살아갈 거,
그렇게 눈을 돌려야 보인다.
내 인생에도 참 이쁜 게 많았다는 게.”
– 태수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 중에서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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