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의 글이 시작되는 곳
한낮의 햇살은 아직 뜨겁지만 어쩐지 바람결엔 여름의 끝자락이 묻어 있었다.
절기인 처서가 지나서인지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함이 느껴진다.
이제 곧 길었던 여름이 새로운 계절의 옷으로 갈아입을 테다.
올여름, 난 바다로 떠났다.
베란다 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는 푸른 빛깔을 띠며 하얀 크림 같은 포말을 부드럽게 품었다.
그 풍경 앞에서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어디에서 읽었는지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만이 인생을 제대로 산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동안 나는 멈춤이라는 단어를 외면 아니 잊고 살았다.
스무 살 무렵, 나는 열정으로 빛났다.
첫 직장에 들어가 누구보다 빠르게 인정받고 싶어 밤늦도록 일했고 성공을 향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채워나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의 나는 활짝 핀 봄꽃 같았다.
향기롭고, 생기 넘쳤으며 반짝였다.
하지만 계절은 늘 변한다.
심지어 봄은 짧고 여름은 길다.
뜨겁게 불타오르는 태양처럼 일과 열정으로 달려온 시간들은 내 삶을 한껏 태웠지만 어느 순간부터 번아웃이라는 그림자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드리워졌다.
이제 나는 여름의 끝자락인 매너리즘이 피어나는 늦여름에 서 있다.
일도, 글도, 열정도, 예전만큼 힘차게 솟아오르지 않는다.
마치 오래 방전된 배터리처럼.
그래서 나는 이번 여름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고, 사진도 찍지 않고, 어디에도 올리지도 않았다.
그저 바다를 바라보는 게 좋았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 보니 내 삶을 단순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래야 더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이런 생각에 조금씩 마음이 동하기 시작했다.
글쓰기도 그렇다.
예전에는 무조건 더 채우려고 했다.
글을 잘 쓰지는 못하지만 자꾸 쓰다 보니 욕심이 생긴다.
더 좋은 문장, 더 깊이 있고 유려한 표현, 더 완벽한 구조를 만들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글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나조차도 숨 쉴 틈이 없는 글이 되어버린 듯하다.
글을 읽는 이에게도 여유를 주지 못할 거라 장담한다.
빽빽하고 답답한 문장만 쌓아 올렸던 글이기에.
바캉스가 삶에 숨통을 틔우듯 글에도 쉼이 필요하다.
그 쉼은 여백에서 온다.
불필요한 말을 지우고, 과감히 멈추고, 생각이 머물 수 있는 틈을 남기는 것.
그렇게 해야만 문장 속에서 진짜 내가 드러나리라 생각한다.
쉼이 있는 글을 쓴다는 건 어떻게 하는 것일까?
사람도 머릿속이 복잡할 때 잠시 생각을 멈추듯이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는 억지로 쓰지 말고 잠시 멈추어야 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에서 자연을 바라보며 영감을 얻었듯 고요함 속에서 문장은 스스로 생겨나기도 한다.
창밖을 바라보거나 산책을 하거나 조용히 숨 고르는 시간을 두어보자.
문장에 여백 남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장은 짧게 하고 문단은 간결하게 해야 한다.
글 사이사이 비워둔 공백이 글을 더 깊게 만들어 읽는 이에게도 생각할 공간을 주게 된다.
삶도 글쓰기도 채우기보다는 비우기가 더 중요하다.
애써 쓴 문장이라도 주제와 어울리지 않으면 과감히 지워서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진정한 비움은 본질을 드러내는 힘이다.
돌아와서 다시 일상에 들어섰다.
여전히 바쁘고 해야 할 일들은 줄지 않는다.
오히려 더 쌓여만 간다.
하지만 이 여름 바닷가에서의 멈춤을 기억한다.
잠깐이라도 비워내면 다시 채울 힘이 생긴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바쁘게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멈추고, 비우고, 숨 쉬듯 글을 쓰고 싶다.
바캉스처럼 쉼이 있는 글을.
채우지 않고 비워두며 그 안에 조용히 나를 담는 글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