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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chi Dec 30. 2023

아직은 답변할 수 없는 물음들

아직이라는 부사를 떼어버리고 싶은 일들

#우리의작은깨달음 #일상다반사 #6


눈을 뜨니 나의 방이었던 크리스마스들이 지나가고 오늘 다시 눈을 뜨니 그 유명한 ‘설국’의 첫 문장이 나의 방 작은 창문 밖에 펼쳐지는 신비. 어느 연애예능에서인가 첫눈은 첫눈이 있는데 왜 첫비는 없는 거지 하는 대화가 있었는데, 그때 비는 사계절에 다 내리고 눈은 특정한 시절에만 볼 수 있다고 한, 남자 출연자에게 여자 출연자는 T니 F니 하는 말들 속에서 겨울이 아름다운 이유는 어쩔 수 없이 하늘에서 내리는 눈에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날씨, 그리고 그 출연자들 서로의 눈에 이는 상대를 향한 겨울이 아름다운 이유와 같은 어떤 설렘들.


내리는 눈을 창의 프레임으로 한 참을 보다가 23년이라는 올 해가 이제 끝이 났구나 하면서 인터넷에 여기저기에 올해의 책을 살펴보았는데 역시 은행의 빚을 다시 져서 더 이상 쌓아 놓을 곳이 없는 나의 작은 책의 성에 자리를 또 마련하고 싶어지는 책들. 그런데 올해도 역시 시집은 올해의 책의 목록에 없는 거 같아서 물론, 나의 ‘도둑맞은 집중력’이 채 30분도 못 버티기고 올해의 책이란 관심사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여서 목록이 있는데도 못 찾은 것일 수 도 있지만, 그래도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다.


그러니까 공을 세우려는 기사에게 귀부인은 그냥 허깨비지요. 기사가 제멋대로 만들어낸 환상이고 명분이에요. 귀부인 자리에 있는 여성에게 마이크를 준다면, 이렇게 말할거에요. 나를 사랑한다고? 내가 당신의 존재이유라고? 왜 그게 나예요? 절벽에 있는 꽃을 따다 내게 바친다니 고맙긴 한데, 당신이 그러거나 말거나 내 알 바 아닙니다._서영채_왜읽는가_p203


쇼윈도 안에 너무나 예쁜 인형은 쇼윈도 안에 있어야만 우리의 인형에 대한 사랑은 유지될 수 있다. 어딘가에 적어 놓은 문장인데, 그때는 사랑과 그것의 이루어짐과 시간의 흐름 그리고 권태에 대한 단상이었던 것 같고, 지금은 관심이 있고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고백 같은 것들을 어려워하고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핑계로 읽힌다. 내 곁에 지금은 너무도 예쁜 인형을 두어도 며칠만 지나면 다른 인형을 바라게 되는 그런 한계에 대한 너무도 편한 동의. 그리하여 쇼윈도 ‘밖’에서만 그 인형을 바라보면 사랑은 계속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하는 속 편한 단념.


우리에게 그렇게 지켜만 보는 너무도 예쁜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한 해가 모두 지나가는 시절에 퍽 어울리는 질문이지 않나 싶다. 나의 목록에는 몇 년 전부터 내 마음에 들어와 앉아 있는 어떤 여자아이가 있고(그녀도 이제는 나이가 꽤나 있는데 왜 자꾸 나는 그녀를 아이라고 표현하는지 모르겠다. 연인에 대한 어떤 환상이 나에게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한 권의 시집을 써보겠다는 마음과 공간을 만들어 아이들과 시로 놀고 싶다는 비교적 최근에 생긴 마음, 단 한 권을 전시하고 그곳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단어와 문장을 만나는 공간, 그 옆에는 공유테이블을 놓고 우리 삶에 중요한 것인데 쉽게 지나치는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일들.


자신이 존재의 이유라는 것에 대한 귀부인의 대답은 싸늘하다기보다는 황당 및 당황으로 보인다. 우리가(기사와 귀부인 자신이) 어떤 시간을 함께한 적이 있나요, 나의 어떤 모습이 당신이 존재하는 이유가 되었나요? 이런 질문들에 대한 기사의 답변 없이 귀부인은 그의 사랑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 그러니까 귀부인에게는 정확하게 자신을 좋아해 달라는 요구가 있는 것이다. 무리한 요구가 아니며 귀부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를, 무엇을 좋아할 때 가장 명확한 이유는 ‘그냥’이지 않을까. 잘은 모르겠는데 당신을 보고 있으니까 좋아한다, 사랑한다라는 단어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마음에 일었다고 답하는 것. 정확한 이유가 있다면 무의식이나 저 먼 우주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아서 지금은 모르겠다는 말. 그 말이 지금 내리는 눈처럼 솔직한 말이기만을 바라고 있다는 말까지.


Ps. 권태가 찾아오는 것이 두려워서 시작을 하지 않는 것은 비겁이다. 그 권태마저 끌어안고 당신을 계속 귀하게 여기고 위해주겠다는 의지들, 당연하게 사랑의 영역에 포함된다고 적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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