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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chi Jan 06. 2024

어제와 내일이 만나 오늘이 있다.

불완전함 같은 것들을 자체적 숙명으로 짊어진 우리들의 본능

#우리의작은깨달음 #일상다반사 #7 #어제와내일이만나오늘이있다


0. 상상 속 소요/逍遙in想像

날짜를 쓰는데 습관적으로 23년을 쓰다가 지웠다. 새해라는 것은 이렇게 일상에서 조금씩 바뀌어지는 일. 이제 23년은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변해서 없어지는 것이 23년뿐이겠는가. 우리는 지나온 시간으로는 다시 갈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늘 마지막에 서 있다는 말을 자주 하고 쓴다. 지금이 그러니까 지금이라는 시간이 지나가면 다시는 ‘이’ 지금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순간적으로 ‘그’ 지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3차원의 물리 영역을 벗어나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있거나 산책을 하면서 우리는 어제와 내일을 마구 쏘다닐 수 있다. 그런 코끼리 뼈를 생각(想像)하는 것에서, 소요(逍遙)하며 만나는 과거와 미래 속의 우리들, 그곳에서 겪는 세상과 사건과 상황들이 물리적 실제가 아니라서 우리의 삶이 아니라고 퉁퉁거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것의 자본주의적 실효성과 별개로 말이다.


1. 매번 다르게.

반복은 차이를 만든다고 했다. 반복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우선적으로 연습 및 훈련 등의 이미지를 떠오른다. 끊임없이 농구공을 골대로 던지는 풋내기 강백호가 그려진다. 숲 속에서 집채만 한 바위를 목검으로(10000번이었던가, 십만이었던가) 계속해서 내리치던 어린 시절 김유신의 구슬땀과 이끌거리는 눈빛의 얼굴도 지나간다. 그리고 깊은 새벽과 빛나는 아침과 활발한 점심과 나른해지는 오후, 신나는 저녁 그리고 불이 꺼지는 밤. 이렇게 지구 자전으로 이루어지는 하루들의 반복. 그리고 계절들의 반복. 이렇게 반복이라는 것들을 적어놓고 보니 정말로 차이가 없는 반복은 없다. 강백호는 드디어 풋내기를 벗어나 멋진 바스켓맨의 폼으로 미들슛을 림 안에 넣을 수 있게 되었고, 김유신은 집채만 한 바위를 갈라버리고 삼한을 일통하며 영웅의 표정을 지었다. 새벽은 안개를 타고 넓게 퍼져나가기도 하고 아침이 적막에 휩싸여 어두울 때도 있으며 정오가 바닥에 쳐 박혀 꼼짝하지 않을 때도 있고 그 문세형과 빅뱅의 붉은노을이 환한 저녁과 밤새 꺼지지 않는 밤, 또한 그런 하루들이 매번 다르게 있다.


2. 성숙해 가는 것일까.

2024년은 1년이 2024번 반복된 것일까. 그리고 그 1년은 수억 년이 반복하다가 누군가 어딘가에 적어 새겨져서 시작된 것이고? 매번 다른 반복의 차이들 속에서 우리는 변화를 하는 것일까. ‘성숙’해가는’ 것일까. ‘성숙’을 해야’만’ 하는 걸까. 만들어진 차이가 무조건 성숙하게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아닌 듯싶다. 우리는 지금도 감정에 휘둘리고 자신만이 가장 중요하며 타인을 강제하려고 하는 본능에 쩔쩔매고, 뱀의 그것처럼 사용되는 정치적/경제적/문화적/사회적 혀들과 그것도 모자라 물리적 폭력의 탱크 발자국은 끊이지 않으며 미사일은 어제도 지금도 우리의 가슴에 꽂힌다. 그렇게 피가 터진 가슴에서 수 백, 수 천, 수 만, 수 억의 반복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런 말들은, 현자들의 쉬운 읊조림이 불현듯 떠오를 때, 그러니까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 우리의 부족과 불완전을 극복해 가는 과정이 삶이 아니겠느냐는 말들, 허공에서 흩어진다.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얼마나 채워야 부족함이 적당함이 되고, 얼마나 덜 흔들려야 불완전이 근사한 완전함이 될까.



공부는 두 단계를 포함하죠. 학습이라는 단어가 그것을 보여줘요. 학(學)이란, 나보다 먼저 알고 있는 사람을 통해 보고 듣는 거죠, 그것이 배움이라는 거예요. 보고 듣는 것이 본이 되죠. 본을 받는 것이 곧 학'이에요.
'습(習)'은 익히는 것이에요. 연습하는 것, 복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습'은 혼자 반복하는 거예요. 아는 사람에게 본을 받아서 그것에 가까워지도록 숙달하는 것이죠. 누군가 옆에서 도와주면 잘되죠. '습'이라는 한자어 속에는 깃털(習)이 있어요. 어린 새들 비행 연습하는 게 '습'이라는 글자의 유래라고 해요._서영채_왜 읽는가_p16-17



3. 꼭 성숙으로만 이어져야 해?

반복은 차이를 만든다는 것, 변하지 않는 형식들의 반복 속에서 내용은 매번 다르다는 것까지 확인하였다. 매번 다르다는 것은 변화를 뜻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궁금함은 이런 것이다. 그런 변화는 우리를 ‘성숙’하게 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상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과 그 이유들 그리고 성숙이 없다면 어린 새들의 비행 연습은 무슨 소용인가 하는 것까지. 이런 궁금함에 대한 답을 찾는 방법 중 가장 쉬운 것은 가슴속 청개구리를 깨워보는 것이다. 반복과 차이가 꼭 성숙으로만 이어져야 해? 누가 그걸 우리에게 강요한 적 있나, 성숙한다는 것이 꼭 좋은 걸까. 그렇다면 좋아진다/나아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등등의 정반대의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것이다. 이렇게 던져진 질문에 골똘하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건 본능이지 않을까.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시간이 흐르고 흐를수록 좀 더 괜찮은 우리가 되기를 소망하고 기대한다는 것, 그것은 실수를 반복하고 타인에 대한 사랑은 부족하고 나밖에 모르는 그런 불완전함 같은 것들을 자체적 숙명으로 짊어진 우리들의 본능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4. 어제와 내일이 만나 오늘이 있다.

어제는 아우가 거나하게 취해서 자정에 가깝게 집엘 왔고 나 역시 혼술 와중, 그러다가 어쩌다가 있는지도 없느지도 몰랐던 사진앨범을 찾아다가 최소 년수가 10년 전인 그런 시절들, 그리고 티브이에서는 이효리가 새로운 프로그램에서 너무도 멋져진 모습으로 노래를 부르고, 노래 제목은 ‘옛 친구에게’. 묘한 기분이 들어서 이 기분이 무얼까 무얼까 하다가 그냥 아름답다고 정해버렸다. 실상 그런 것이다. 뭐, 뇌가 우리의 기억을 미화하고 나쁜 것은 무의식의 저편에 생존을 위해 저장한다는 신경과학적 사실과는 별개로, 우리는 지나온 시절을 아름답게 바라보면 된다. 실수와 후회의 사건과 상황들 역시 그 당시에는 나름 최선의 결과를 위한 분투였기에 그것이 아름답지 않을 이유가 없을 필요 없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앞으로 펼쳐질 우리의 삶과 그 속에서의 우리들이, 좀 더 형편이 나아지고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 반복의 형식과 차이의 내용이 성숙해지기를 상상하는 것, 그런 어제와 내일이 만나 오늘이 있다.


Ps. 반복과 차이와 성숙을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이야기로 전하고 싶어서 글을 썼다는 이야기를 덧붙여 놓는다. 언제나 글을 쓸 때면 잡다했던 생각들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글은 애초의 주제를 잃고 중구난방이 된다. 그리고 아직은 매끈한 시퀀스보다는 화려한 쇼트가 더 좋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이유가 매끈한 구조를 만들지 못하니 반대급부로 단편적인 문장에만 더 신경 쓰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도 적어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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